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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의 시조와 유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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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인 댓글 0건 조회 1,514회 작성일 19-08-13 16:02

  한 겨레나 가계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을 始祖(시조)라 하며, 성씨마다가 아닌 성씨의 본관마다 각각의 시조가 있다.
또 鼻祖(비조)라는 말은 어원적으로는 시조를 일컫기도 하며, 일부 성씨에서는 시조와 함께 創姓祖(창성조) 또는 得姓祖(득성조)를 모시기도 한다.

시조에게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부친과 조부가 있어 태어나기도 했을 것이고, 고려초기처럼 왕이 많은 공신들에게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하사 받은 사람이 시조가 되며 득성조가 되는 것이고 통상 그 사람의 고향을 본관으로 한다.

요즘은 외국인이 귀화하여 새로운 성씨로 등록하였다면 이 사람이 창성조이며 시조가 되는 것이다.
 

우리 파주염씨의 시조는 ‘邢明(형명)’이시다.
生卒墓는 미상이고, 호는 大司徒公(대사도공)이며, 벼슬은 三韓壁上公臣大司徒(삼한벽상공신대사도)이다.


시조의 출생과 돌아가신 연대 및 묘소는 미상이며, 벼슬 벽상공신에 대하여는 고려 태조 23년(940) 新興寺(신흥사)를 重修(중수)하면서 功臣堂(공신당)을 세우고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고 동서 벽에 공신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를 삼한벽상공신이라 하며 公께서도 이때 三韓公臣(삼한공신)에 책봉되었다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고려사의 자료는 고려사(高麗史) 7권 세가7 문종1

'十年丙申二月甲午有司奏: "沒蕃人廉可偁 軍器丞位之子三韓功臣司徒邢明之孫於庚戌年中...이하생략.'


'고려제11대 문종 10년 丙申(서기1056년) 봄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거란군에게 잡혀 갔던 염가칭은 군기승 '位'의 아들이고 삼한공신 사도 '형명'의 孫인데 경술 년중...생략.‘이라는 기록에서 시조가 삼한공신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또 1988년도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가 발행한 '전라문화논총'에 실린 박천식교수의 논문중 '삼한공신 일람표'에도 실려있다.

다음 염씨의 득성조라고 하는 海東譯史(해동역사)편의 2천여년전의 廉斯鑡(염사치)의 기록을 보면
'按後韓(?)書建武中韓廉斯人蘇馬諟來獻光武封爲廉斯邑君則廉斯本邑名而爲氏也鑡集韻云測角切人名王莽時有'


'후한서를 상고하면 건무중(서기25~55년)에 한의 염사 사람 소마시가 래헌하니 광무(서기24년)가 염사읍의 군에 봉하고 염사는 본래 읍명 이었는데 이로 성을 삼았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어 염사치를 우리의 득성조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며, 지금도 우리나라 성씨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연구되는 대상이다.


또 하나의 기록은 조선시대 조여적(趙汝籍:선조~인조)이 쓴 청학집(靑鶴集)에 "廉氏 出于 帶方國也(염씨출우대방국야)"라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염씨는 대방국(帶方國)에서부터 왔다’라는 것이다.
대방국은 황해도일부와 경기도 서북부 장단(長湍) 풍덕(豊德) 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이곳과 득성조 염사치가 살던 곳, 또 시조가 살던 곳 모두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인 것은 모두가 연관이 있지 않는가 싶다.


또 시조 이전부터 이 땅에는 많은 염씨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서기 647년인 선덕여왕 16년에 국정에 참여했던 '염종'과, 648년인 진덕여왕 1년 6공(六公) 가운데 1인으로 김유신과 함께 대신을 지낸 ‘염장’을 비롯하여, 국보제104호인 경복궁의 '염거화상탑'의 장본인 '염거' 등이 있고,
고려 개국 무렵인 918년경 ‘廉湘’이 혁혁한 공훈으로 2등공신이 되었고, 고려태조 11~20년간에
大相 '염경' 또 태조 26년(934년)에도 재신으로의 ‘廉相’과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


또, 왕건 즉위 불과 10여일 후에 궁예 휘하의 잔존세력인 반란군중 공주지역 실력자인 이흔암을 체포한 사람이 수의형대령 '염장'이고, 태조1년 청주 출신 순군낭중 현율과 같은 반역자를 체포한 사람이, 마군대장군 '염상진'이다.

이러한 기록들로 우리 염씨는 2천년 전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고유의 토착성씨로 보는 견해이다. 그 어디에도 중국에서 왔느니, 신라 말에 귀화하였느니 하는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동안 기록으로 나타난 분들에 대하여 가족관계를 알 수 없다는 것뿐이지 유구한 역사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의 기록에서 가장 주목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와 자료 찾기에 전념해야할 부분은 고려 초기에 나타난 세 분의 관계이다.

시조이신 ‘형명‘과 2등공신 ’湘‘, 또 왕건의 유언 때 옆에 있었던 ’相‘의 세 분에 관한 것인데, 기록으로 봤을 때 보통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각각 단막으로 끝난 것이 이상하다. 혹시 동일인은 아닌지 하는 견해를 가진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시조에 대하여는 그동안 회보에서나 인터넷의 우리 홈에서나, 대동보 문헌록 등에서 수 없이 설명을 하였는데, 아직도 일부에서는 우리 염씨가 중국에서 왔느니, 신라말에 귀화하였느니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가 오도록 가장 크게 악 영향을 끼친 것은 일부의 우리 일가들의 잘못도 있지만 1982년 6월27일자 중앙일보의 ‘성씨의 고향’ 연재 중 우리 파주염씨 편에서 ‘略...형명은 원래 중국교목세가의 후예. 후당 때 국정이 어지러움을 비판하고 신라로 건너와...’ 하는 근거도 없는 엉터리 기사가 한 지역종친회원들의 사진과 함께 실렸고, 그 뒤 1990년대 인터넷이 한창 붐을 타던 시절 이 기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처도 밝히지 않고 잘못된 기사의 검증도 없이 마구잡이로 인터넷에 퍼 나르기 하면서 퍼져나갔다. 그때 관공서와 제대로 관리되는 대형 사이트는 거의 시정조치 하였으나, 일부 카페나 개인이 운영하는 소형 사이트들은 손을 댈 수 없었다.


1986년 대동보와 함께 발행된 문헌록 52쪽에서 ‘略...중국계 염씨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大宗을 이루고 산다는 史的근거는 찾아 볼 수 없는 낭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못 박았으며, 위에 언급한 모든 기록들이 증명하니 앞으로는 더 이상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홈 - 문헌자료 - 염씨내력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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