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염태호 교수님'이 KBS홈에서
복사하여 요약한 내용이다.-
850년전 한 여인에게 죽음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마흔 일곱해(47세)의 삶은, 깊은 어둠 속으로 사그러 든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발견된 한 장의 낡은 돌판, 그것은 한 고려여인의 삶이 어둠을 뚫고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고려시대 묘지석들은 귀족들의 전유물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알려주거나, 때로는 잘 못 기록된 역사를 바로 잡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묘지석 대부분이 개성과 경기지방에서 출토됐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고려의 지배계층은 중앙에 거주함으로써 귀족적 특권을 누렸음을 의미한다.
묘지석의 글
: "아내의 이름은 경애였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나의 한이 어떠하였겠는가 ? 믿음으로써 맹서하노니, 그대는 감히 잊지 못하리라.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하는 일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아들과 딸들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떼와 같으나 부귀가 세세로 창성할 것이로다"
아내의 죽음을 안타까와하는 한 남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새겨진 이 묘지석은 고려때 사망한 여인의 무덤 속에 있었다.
무덤 앞에 세워두는 [묘비]와 [묘비석]은 망자와 함께 묻어둔 것인데, 일반적으로 망자의 일생과 성품, 가족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남편이 써놓은 죽은 아내의 묘비명
: 특히 묘지석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글을 쓴이가 바로 망자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시대의 묘지석은 모두 100여개, 그 중 여성의 것은 34개가 있다.
이들 중 남편이 직접 글을 쓴 경우는 이 묘지석이 유일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묘지석들과는 달리, 부부관계와 가족관계 등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을 보다 풍부하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부부간의 깊은 사랑이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을 누르면 크게 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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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샬 오늘 이 시간에는 고려여인의 묘지석을 통해 고려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 가족관계를 복원해 놓도록 하겠다.
묘지석의 주인공 여인
: 묘지석의 주인공, 그녀는 누구였을까요 ? 훼손이 심하지 않아서, 다행히 대부분의 글씨를 알아 볼 수 있다.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요 ?
고려시대 금석문을 연구하는 김용선 교수의 도움을 받아서, 묘지석을 해석해 보기로 했다. 확인 결과, 묘지석의 주인공은 염경애라는 이름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1145년 병을 얻어 1146년 음력 1월에, 47세로 세상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염경애묘지명에는 가족관계나 여성의 경제적 지위, 역할 등 많은 정보가 있는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염경애라는 이름이다. 조선도 마찬가지지만 고려도 여성들은 이름을 갖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의 관료적인 지위에 따라서 군, 대부인, 현, 군과 같은 봉작호를 갖게 되는데, --염경애는 동시에 이름을 가지고 있고, 남편도 묘지를 쓰면서 아내의 이름은 경애였다고 했다.
염경애의 가족관계 : 묘지석을 통해 염경애의 가족관계도 확인해 보면, 먼저 그녀는 최루백의 아내였다.
염경애의 아버지는 대부소경(太府少卿, 종4품=부이사관)을 지낸 염덕방(廉德方),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志義, 1083-1162)다.
또한 염경애는 최루백과의 사이에 자녀가 6명인데, 그들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염경애의 가계를 찾아보기로 했다.
족보를 연구하는 '회상사'에서 염이라는 성씨에 관해 알아 보았다. 확인해 본 결과, 국내에 염씨 성의 사람들은 본관이 하나뿐임을 알 수 있었다.
파주염씨대동보(1986) : 850년전에 살았던 여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 파주염씨 가문의 족보에는 고려시대의 조상들도 일부 기록돼 있다. 만약 염경애가 이 가문의 일원이라면, 족보에 그 흔적이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 족보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목을 끄는 이름이 있었다.
파주 염씨 6대조, 덕방(德方)... 바로 이 사람이 우리가 찾는 염경애의 아버지일까 ? 염덕방의 자녀들을 확인했다. 순약(順若).... 신약(信若)이 나오고 경애(瓊愛) !, 분명 우리가 찾던 인물이었다.
여자에 대한 지석이 그의 어머님이나 따님처럼 오랜 시간의 차이를 두고도 발견됐다는 것은 다른 데서는 잘 못 봤으니까 굉장한 것이다.
파주염씨족보에 실린 염경애 가족과 관련된 기록은 어머니 심씨의 묘지석을 통해 확인한 내용들이다. 이 묘지석을 통해 염경애와 그녀의 형제들 이름까지도 모두 밝혀낼 수 있었다.
염경애 집안의 위치
: 고려사회에서 염경애의 집안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 가족의 사회적 지위는 그것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염덕방이란 분은 태부소경(종4품)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장인이 되는 심후라는 분(덕방의 아내, 의령군 대부인 심지의씨의 부친)은 승선(정3품)을 지냈다는 것을 보면 결혼상대가 되는 집안도 꽤 가세를 이어온 집안이다.
염경애는 바로 이 염덕방의 6남매 중에 한 분이다.
그 중에서 충약(忠若)이라는 분은 충주수령, 신약(信若)은 과거에 급제했고 그래서 이부상서를 거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즉, 종2품의 재상 벼슬에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집안의 내용을 볼 때, 염경애의 집안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문벌귀족이나 대귀족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귀족가문으로서의 위치를 이어 간 그런 집안으로 생각된다.
염경애의 성품
: 권세있는 귀족 가문의 여인 염경애, 남편이 쓴 묘지석의 내용을 통해 그녀의 성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묘지석의 글
: "아내는 사람됨이 조심스럽고 정숙했으며 자못 문자를 알아 대의에 밝았고, 말씨, 용모, 일솜씨가 여늬 여인보다 뛰어났다. 부녀자의 도리에 부지런히 힘써 나의 돌아가신 어머님을 효성껏 봉양했고, 친척들의 경조사에 힘써 살피니...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묘지명은 부인이 죽은 뒤 남편이 썼기 때문에 가능하면 아름다운 추억이나 고운 말만 골라 썼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를 고려하더라도 최루백은 23년간 살면서 부인에 대해 못잊을 이야기들을 회고하는데, 시부모에 대한 공양을 이야기...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위해 몸소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스스로 길쌈한 옷으로 제단에 바치기도 하고, 제에 참여한 중들에게 양말을 나눠주는 등 헌신적인 효성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숙하고 현명했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최루백은 매우 상심한다. 그는 슬픔을 글로 써 남기는데, 이것이 묘지석에 새겨져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남편 최루백(崔婁伯)
高麗史 [통권 18권 世18권-02쪽 앞5, 04쪽 뒤3],
[통권 74권 志28권-23쪽 앞3],
[통권 121권 列傳34권-13쪽 뒤9, 14쪽 앞1줄].
아내의 죽음 앞에서, 함께 묻히지 못함을 통탄했던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
염경애의 묘지석에서 몇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최루백은 아내 사망 1년전, 정6품의 '우사간', '좌사간' 지위에 올랐고, 아내가 죽던 해에 '시어사'로 진급했는데, 재미있게도 그 이듬 해 '예부원외랑'으로 다시 한 단계 좌천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아내의... 빈자리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닐까 ? 묘지석의 내용들을 토대로 남편 최루백을 밝혀 보겠다.
한남 최루백(漢南 崔婁伯).....
: 바로 이 한남이라는 본관이 최루백의 실체를 찾아내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족보신문에서, 최루백의 본관으로 짐작되는 한남은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해 보았다. 한남 최루백... 수주(水州)는 원래 수성(水城), 수주는 수원최씨, 한남(漢南)이 현재 수원(水原) 최씨의 옛 본관 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효자 최루백(孝子 崔婁伯) : 수원 최씨 집성촌이 있는 봉담읍, 사도세자 무덤에서 불과 1km 떨어진 이곳은 '효자문골'이라 불린다. 뜻밖에도 수원 최씨 후손들은 최루백을 잘 알고 있었다. 수원최씨(水原崔氏) 시조가 바로 최루백의 부친이었다. 종손들은 최루백이 요즘세대에선 보기 힘든 효자였고, 효성으로 벼슬을 했다는 것이다. 최루백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효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음
: 최루백이 15살때, 아버지 최상저가 호랑이에게 잡혀 죽음을 당한다. 원수를 갚겠다며 호랑이를 찾아나선 최루백은 드디어 마을 뒷산에서 쉬고있던 호랑이를 발견해서 가지고 있던 도끼로 호랑이를 죽인 후, 부친의 시신을 되찾아 묻어줬다.
이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이 마을의 뒷산에는 최루백이 호랑이를 죽였던 곳이라고 알려진 장소가 있다.
효암(孝岩), 효자구멍, 효자비
: 15m 남짓한 바위가 현재 효암으로 명명된 것은 조선 후기 정조때였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방문하기 위해 이곳에 온 정조가 최루백의 효행에 감복해 이름을 내려줬다.
그 동네에는 부녀자들이 효자를 낳아 달라고 만든 구멍인 효자구멍도 있고, 마을 어귀에는 효자비가 있다. 이것은 연산군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역시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교과서인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등에도 최루백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이같은 흔적들을 통해서, 최루백은 젊었을 때 이미 효행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최루백의 성품
: 최의 성품은 염경애의 묘지석을 통해 몇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의 관직은 대부분이 명예를 중시하는 청요직이었다. '정언'이니 '사간', '시어사' 벼슬을 지내는데, 그것은 왕에게 정책을 건의하고 왕을 보조하는 벼슬이다.
또 하나 국자사업이나 국자제주니 하는 교육관의 지위에 있었고, 예부낭중 등의 예를 다루는 직에 근무... 이를 감안해 볼 때 최루백이 예절이 바르고 충성스러우면서도 청렴한 생활을 한 중견 관료로 생각된다.
젊어서는 효성으로 이름을 드높였고, 관리가 된 후에는 청렴한 생활로 일관했던 사람...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은 아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글로 남김으로써 이렇게 죽어서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결혼 사연
: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염경애는 개경에서도 권세있는 귀족집안의 딸이고, 남편 최루백은 수원 향리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염경애는 자기보다 못한 집안의 아들에게 시집간 셈이 된다. 엄격한 신분질서가 유지되던 고려시대에 이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염경애와 최루백, 이들은 과연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됐던 것일까 ?
고려시대, 지방출신이 귀족집안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다. 한가지 추정되는 단서는 최루백이 과거에 합격했다는 사실이다. 과거급제자인 경우, 장래가 유망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권세있는 집안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본다면, 최루백은 과거에 급제한 후 염경애와 결혼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유학자인 이색의 사례를 통해서도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색이 13살에 과거에 합격하자, 개성의 권문세족들이 그를 사위삼기 위해서 결혼 전날까지도 쟁탈전을 벌였다. 이는 과거 급제자에 대한 선호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결혼 풍속도
: 지금도 그런 측면이 남아있지만, 전근대적인 귀족사회인 고려사회에서 결혼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다. 결혼상대자가 누구냐가 그 가문의 사회적 위세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끼리 중첩된 혼인관계인 인연을 통해서 패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했다. 출세를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뿐 아니라 혈연이 매우 중요했던 사회, 그것이 바로 고려 귀족사회였다. 때문에 능력있는 남성의 경우, 자신보다 좋은 가문의 딸을 배필로 맞는 경우도 잦았다.
고려사열전에 나오는 송유인은 원래 돈 많은 상인의 딸에게 장가가서 그 덕에 벼슬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무신 집권기가 되자 권력가였던 정중부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버린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처가를 이용한 것이다.
가문과 출세
: 고려시대는 출세하는데 남자의 가문뿐 아니라 아내의 가문도 매우 중요했다. 때문에, 족보에서도 여성쪽의 기록이 남성과 동등하게 기록되고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가족제도를 한 마디로 특징을 얘기한다면 남계와 여자계열이 동등하게 기록되어 있고, 동등한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남과 여가 분리되지 않고... 구분의식을 가진 것은 성리학 사상이 도입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사회, 친족조직내에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과 딸의 구별이 없었던 만큼, 딸과 결혼한 사위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그 가문의 일원으로써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최루백의 경우도, 귀족의 딸인 염경애와의 결혼이 출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혼생활
: 염경애와 최루백의 결혼생활은 어땠을까? 묘지석의 내용을 통해 그들의 살림살이가 그다지 넉넉치 않았던 같다.
관료로서 녹봉과 토지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토지의 경우... 성인 3.6명이 1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받아, 녹봉은 2인이 조금 넘는 양을 받았다. 그러니까 하급관리의 경우는 성인 5명 정도가 1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다... 하급관리의 생활이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묘지석에 따르면, 의복과 식량을 구하는 일은 전적으로 염경애가 맡고 있다. 이를 통해, 가계를 책임자는 아내 염경애의 몫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었을까 ? 길쌈 같은 일이 있겠지만, 그들이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해서 얻어지는 수입은 힘들었을 것이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고려시대는 남녀균분 상속...고려때 여자들이 재산상속을 해서 살림에 보태는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최루백의 경우도, 아내 염경애의 친정에서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아내의 내조를 바탕으로 최루백이 청렴한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850년전, 최루백 염경애 부부의 일상생활이었던 것이다.
최루백의 묘지석
: 염경애가 사망한 후에 최루백은 재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루백의 묘지석의 탁본은 매우 심하게 손상되어서 알아보기가 쉽지는 않은데, 여기에 매우 놀랄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재취유...삼남..녀, 염경애 외에 유씨라는 여자와 또 결혼을 해서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으나, 최루백과 염경애 부부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200년후 원의 간섭기에 일부다처제가 나타났다.
최루백과 염경애의 자녀들, 그리고 승려제도
: 묘지석에 따르면, 염경애와 최루백 부부 사이에 첫째 딸 귀강이 남편과 사별한 후에 집에 돌아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딸을 포함해서 모두 여섯 자녀가 있었는데, 또 한 명의 딸은 아직 어리다고 적혀 있다.
4남 2녀 : 그리고 네 명의 아들 중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모두 유학에 뜻을 두어 공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넷째 아들 '단지'는 출가한 걸로 되어 있다(승려가
되었다는 뜻)
넷째 아들 : 그런데...아버지 최루백의 묘지에는 이 '단지'가 벼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부음....' 이것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가했다가 다시 환속해서 벼슬을 했다는 뜻인데... 이 넷째 아들 '단지'는 귀족의 아들이면서 왜 출가를 했던 것이며, 그 뒤엔 다시 환속했던 것일까요 ?
사례를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확인 가능한 아들의 숫자는 731명. 그 중 74명이 출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에는 귀족가문의 자제가 출가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교국가 고려 : 고려는 불교국가라는 점,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아들 여럿중 한두 사람의 출가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때문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동시에 주어지는 일이었다. 귀족 자제는 물론이고 일반인 중에서도 출가하려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집에 세 아들이 있으면 아들 중에 한 명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출가하는 데 큰 제약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승려가 됐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승과제도
: 고려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과(僧科)를 거쳐야만 했다. 고려시대 승과는 스님들이 치르는 과거시험과도 같은 것으로 합격한 사람에게 승적을 주는 제도였다.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은 승계와 승직을 받아 불교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즉, 불교 교단내에서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 불교 조직은 관료조직과 매우 흡사했다. 왕이 임명권을 가진 것도 두 조직의 공통점이다. 이것은 고려왕실에서 관료조직과 마찬가지로 불교 교단을 통제하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승과를 실시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 신진관료를 양성해 정치개혁을 추진한다.
신진세력 양성법이 과거제도 실시였는데, 그와 같은 시기에 신진승려를 양성해서 교단체제를 장악하려는 목적에서 승과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왕실은 한쪽으로는 행정조직을, 다른 한 쪽으로는 불교 교단을 이용해 중앙집권 통치를 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 합격자에게 관직과 토지를 부여했다. 승려 신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과거 합격자와 다름 없었던 것이다.
방송 기본 세트
: 오늘 우리는, 한 장의 묘지석을 통해 12세기에 살았던 고려귀족들의 전형적인 삶과 죽음의 통과의례를 엿볼 수 있었다.
귀족가문의 일원이었던 염경애와 최루백 부부의 가족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85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한 장의 묘지석 때문에 가능한 일이이었다. 기록에 조차 남겨져있지 않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비밀의 문, 바로 그것이 고려시대의 묘지석인 것이다.
850년전, 고려의 귀족이었던 염경애는 남편의 애절한 사랑이 새겨진 묘지명과 함께 땅속에 묻혔고..... 곁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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