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실

온전하게 이름 석 자를 남긴 고려 여성 염경애    (보학)    
    2007-08-12 (일) 20:50   조회:2408  
                                                                                                       정해은 / 성공회대 강사
남편이 묘지(墓誌)를 쓰다
서기 1146년(인종24) 정월, 최루백(崔婁伯)은 아내 염경애(廉瓊愛, 1100~1146)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고생만 하다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과 연민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염경애는 남편 최루백이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로 승진한 기쁨을 누린 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은 1145년 9월에 병을 얻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무색하게 생활고에서 조금 벗어나는가 싶더니 병을 얻은 지 4개월여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최루백은 애절한 마음으로 묘지(墓誌)를 지어 무덤에 묻으면서 죽은 아내에게 자신의 슬픔을 전했다.
염경애. 이 여성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남편이 지은 이 묘지 때문이다. 묘지는 죽은 자를 추념하는 뜻에서 그 일생을 기록해 무덤 속에 묻는 석판이나 또는 거기에 새긴 글로서, 고려시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염경애 묘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고려의 묘지석은 100여 개이며, 이 가운데 34개 정도가 여성의 것이다. 특히 그이의 묘지는 남편이 직접 글을 지었다는 점에서 더 눈길을 끈다. 대체 그 속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일까?  
이 묘지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부분은 ‘염경애’라는 이름이다. 고려시대 여성의 묘지를 살펴보면 ‘낙랑군 부인 김씨 묘지’나  ‘이자원의 딸 이씨 묘지’ 등, 여성은 이름을 갖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름 대신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봉작호를 사용하거나, 아버지 이름을 빌려 여성의 존재를 나타냈다. 하지만 최루백이 묘지에다 “아내 이름은 경애다.”라고 밝힘으로써, 그이는 고려 여성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전한 아주 드문 여성이 되었다.  

향리 집안과 혼인한 귀족의 딸
염경애는 아버지 염덕방(廉德方)과 어머니 의령군 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큰딸로 태어났다. 그이 집안은 명문은 아니나 개성의 귀족 가문이었다. 최루백의 회고에 따르면, 그이는 사람됨이 정숙하고 자못 문자를 알아 대의에 밝았다고 한다. 염경애 묘지를 남편이 썼으므로 그 행실이 미화됐을 가능성이 높지만, 여성 묘지에 문자를 알았다는 기록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염경애는 25세의 늦은 나이에 최루백과 혼인했다. 시가는 대대로 수원 지방의 향리를 지냈으며, 시아버지 최상저도 호장(戶長)이었다. 고려시대 향리는 토착 기반이 강한 세력이며, 호장은 향리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개성 귀족이 지방의 향리 가문과 혼인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고려시대는 귀족들이 통치하는 사회로서 귀족간의 중첩된 혼인을 통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려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최루백이 염경애와 혼인한 것은 그가 과거 시험에 급제해 장래가 유망했기 때문이다.

일하는 여성으로 살다
최루백 집안은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다. 또 최루백은 염경애가 죽기 한 해 전인 1145년 초까지 정7품의 하급 관리로 있었다. 이때 염경애의 나이는 46세였다. 25세에 혼인했으니 결혼한 지 20년이 넘도록 염경애는 가족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그러나 당시 여자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아 길쌈이나 품앗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최루백은 어려운 생활을 같이한 23년 동안의 일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고 슬퍼했다. 노동에 지친 염경애는 때때로 글만 읽는 자식들이 야속하기도 하였다.  

자식들이 글만 읽고 일하지 않는 것을 숭상합니다. 나는 집안살림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의식(衣食)을 맡아 힘써 하려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혹 내가 죽은 뒤 자식들이 많은 녹을 받아 무엇이든 뜻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어미를 재간이 없다 여기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느라고 고생한 일을 잊지 않겠습니까?

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염경애 나이 46세 되던 봄, 최루백은 정6품의 우정언지제고로 승진했다. 염경애는 이제 살림이 조금 나아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이에 남편이 “직언하는 직책이지 녹만 먹는 자리가 아니다.” 하며 핀잔을 주자, “단 하루만이라도 당신이 전각의 섬돌에 서서 임금과 시비를 다툰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간다 해도 기쁘겠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최루백은 이 일화를 염경애의 부덕을 기리기 위해 묘지에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염경애 자신이 지금껏 남편의 출세나 바라면서 살지 않았으며, 자신도 신하의 도리가 무엇인지 안다는 항변으로 읽힌다. 염경애가 죽은 뒤 남편은 재혼해서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그리고 한때 좌천도 당했지만 승진을 거듭했다.

버선을 지어 절에 시주하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종교이자 생활이었다. 생활이 여유가 있는 귀족 여성은 아침에 일어나 불경을 외고 낮에 길쌈을 하다가, 밤이 되면 불경 읽는 것으로 일과를 마친다고 할 정도였다. 가정에서는 불경을 독송하며 불심을 닦았고, 밖으로는 시주 활동을 통해 신앙심을 실천했다.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면서 불교에 깊이 귀의한 염경애는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 절에 물품을 시주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재(齋)가 있는 날이면 정성껏 버선을 지어 절에 시주했다. 또한 슬하의 4남 2녀 가운데 넷째 아들 최단지(崔端智)를 출가시키기도 했다. 당시에는 불심이 강한 어머니가 아들을 출가시키는 일은 종종 있었다. 최단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환속해서 관직에 나갔다.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그이의 신심은 장례 절차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염경애 장례는 불교의례로 치러졌다. 1월에 집에서 죽은 뒤 그이의 시신은 순천원에 안치되었고, 2월에 화장해서 뼈를 청량사에 두었다가 3년 뒤에 장사지낸 것이다.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시신이 개경에 있는 친정아버지 묘 옆에 묻혔다는 점이다. 귀족의 신분으로 개경에 묻힌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 가족 제도가 여성을 출가외인이 아닌 친정 쪽의 가족 구성원으로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하지만 역사에 남은 여성
염경애. 죽은 뒤  850여 년이 넘은 오늘날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남편이 쓴 묘지 덕분이다. 그 삶을 돌이켜보면 특별한 사항은 별로 없다. 다른 여성의 묘지에서도 그이처럼 살다간 사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에게 염경애의 삶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물러서지 않고, 평범하지만 치열하게 살다갔기 때문이다. 그 치열한 삶이 남편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그이의 생애를 기록하게 했으며, 우리는 그 묘지를 보면서 한 평범한 인간이 역사 속에 어떻게 남았는지 확인하게 된다.

정해은 / 성공회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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