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실

고려부인 염경애 묘지명    (보학)    
    2009-01-17 (토) 14:34   조회: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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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염씨 上系 7세 염경애(諱 廉瓊愛) 묘지명

황통(皇統) 6년 병인(인종 24, 1146) 정월 28일 무술일에 한남(漢南) 최루백(崔婁伯)의 처 봉성현군(峯城縣君) 염씨(廉氏)가 마을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천원(順天院)에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가 2월 임인일에 서울 북쪽 박혈(朴穴)의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화장하였다. 유골을 봉하여 임시로 서울 동쪽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모셔두었다가, 3년이 되는 무진년(의종 2, 1148) 8월 17일에 인효원(因孝院) 동북쪽에 장례지내니,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다. 루백이 다음과 같이 묘지(墓誌)를 짓는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공의 딸이고,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沈氏)이다. 아내는 25세에 나에게 시집 와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장남은 단인(端仁)이고, 2남은 단의(端義)이고, 3남은 단례(端禮)인데,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고, 4남 단지(端智)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장녀 귀강(貴姜)은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최국보(崔國輔)에게 시집갔는데 최씨가 죽자 집에 돌아와 있고, 2녀 순강(順姜)은 아직 어리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자못 문자(文字)를 알아 대의(大義)에 밝았고 말씨와 용모, 일솜씨와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하고자 하는 그 뜻을 받들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안팎 친척의 좋은 일과 언짢은 일,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에는 다 그 마음을 함께 하였으니, 이로써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패주(貝州)와 중원(中原)의 원으로 나갔을 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함께 천 리 길을 가고, 내가 군사(軍事) 관계에 종사하는 동안 가난하고 추운 규방(閨房)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 주었다. 혹은 엄환(閹宦, 內侍)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털어서 음식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으니,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간의 일들은 다 적을 수가 없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지 못하여서, 명절이나 복일(伏日)과 납일(臘日)이 되면 매번 몸소 제사를 드렸다. 또 일찍이 길쌈하여 이것을 모아서 저고리 한 벌이나 또는 바지 한 벌을 지어 제삿날이 될 때마다 영위(靈位)를 모신 자리를 베풀고는 절하고 이것을 바쳤으며, 곧 재에 나아가 무리가 많든 적든 버선을 지어가서 모두 중들에게 시주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잊지 못할 일이다.
평일에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독서하는 분이니, 다른 일에 힘쓰는 것이 귀중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집안의 의복이나 식량을 주관하는 것이 맡은 일인데, 비록 반복하여 힘써서 구하더라도 뜻과 같지 않은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설사 불행하게도 뒷날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게 되고, 그대는 후한 녹봉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되게 되더라도, 제가 재주 없었다고 하지 마시고 가난을 막던 일은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크게 탄식을 했다.
다음 을축년(인종 23, 1145) 봄에 내가 사직(司直)으로부터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면서 말하였다. “우리의 가난이 가시려나 봅니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간관(諫官)은 녹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 아내는 “문득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쟁론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았다. 그 해 9월에 아내는 병이 들었는데 병인년(인종 24, 1146) 정월에 병이 위독하게 되어 세상을 떠나니, 한(恨)이 어떠하였겠는가.
나는 병인년 여름에 우사간(右司諫)에 오르고 12월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옮겼다. 정묘년(의종 1, 1147) 봄에 시어사(侍御史)로 옮겼다가 그 해 겨울에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로 좌천되었다. 무진년(의종 2, 1148) 봄에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옮기면서 그대로 청주부사(淸州副使)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벼슬이 오르면서 계속하여 후한 녹을 먹게 되었는데, 집안을 돌아보면 의식(衣食)은 오히려 아내가 어렵게 애써서 구할 때와 같지 못하니, 누가 아내를 말하여 재주가 없었다고 하겠는가. 아내가 장차 목숨을 거두려 할 때 나에게 유촉(遺囑)을 하였고 여러 자식들에게도 유명(遺命)을 남겼는데, 그 말들이 모두 이치에 닿아 들을 만한 것이 많았다. 세상을 떠날 때, 대개 나이가 47세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미쁨을 찾아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아직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이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 딸들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 떼와 같으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皇統六年丙寅正月二十八日戊戌
漢南崔婁伯之妻峯城縣君廉氏卒於里 第殯于順天院二月壬寅火櫬于京城北

朴穴西北崗緘骨權安于京城東淸凉寺

其三年戊辰八月十七日葬於因孝院 東北君皇考墓之側

婁伯誌其墓曰君諱瓊愛 檢校尙書右僕射大府少卿
廉公德方之女也母宜寧郡大夫人沈氏 君年二十五歸于我

生六子
一男曰端仁 二曰端義 三曰端禮俱志學 四曰端智度爲僧

一女曰貴姜適興威衛錄事崔國輔 崔氏亡還在室 二曰順姜尙幼

君爲人玲瓏肅頗識字曉大義言容功 行出人之右未嫁善事父母旣嫁克勤

婦道先意承旨孝養吾先夫人內外親戚

吉凶慶弔咸得其情人莫不以此多之昔

我出倅貝州中原不憚跋涉偕至千里或

從軍事守因寒閨屢寄征衣

或預閹宦供饋有無凡從我于艱

二十三載之事不可殫記然不及事

吾先君歲時伏臘每躬奠獻又嘗親自

紡績銖積寸累手縫一衣或一褌每至諱日

設靈座拜獻仍隨赴齋衆多小作襪子幷

施于僧此最不可忘

者平日嘗與我言曰子以讀書

不事事爲尙吾以主家 衣糧爲職雖復僶俛求之不如意者時或
有之設或不幸他日我殞賤命而子 饗厚祿動輒稱意無以我爲不才而忘 其禦窮也言訖大息

越乙丑春吾自司直傳右正言知制誥
君喜動於顔
曰吾貧幾濟矣吾應之 曰諫官非持祿之地君罵 曰儻一日子立殿陛與天子爭是非 雖荊釵布裙荷畚計活亦所甘心此 似非尋常婦言也 其年九月君疾作至 丙寅正月疾篤而逝何恨如之予於

丙寅夏傳右司諫冬十二月轉左司諫 丁卯春轉侍御史其年冬貶禮部員外 戊辰春轉禮部郎中仍授淸州副使
累遷官序繼食厚祿顧家衣食反不如 君僶俛求時孰謂君爲不才也 君之將死遺囑於我及命 諸子言皆詣理多可聽者其死時 蓋年四十七矣

銘曰尋信誓不敢忘未同穴甚痛傷 有男女如鴈 行期富貴世熾昌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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