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의
염제신 편 염제신 廉悌臣
(1304-1382)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원. 아명은 불노. 자는 개숙. 할아버지는 충정공
승익이시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모부인 원나라 평장사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라다가, 원나라 태정황제의 눈에 들어 궁중으로
들어갔다. 수년간 황제를 시종하다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고려에 다녀간 뒤 상의사가 되었다.
다시 어머니 봉양을 청하여 고려로 와서
정동성낭중이 되었는데, 정동성에 있는 동료들의 횡포를 극력 제지함으로써 충숙왕의 신임을 받았다. 원나라에 다시 소환되어
익정사승이 되었으며, 절강성에 사신으로 갔다. 그곳의 중정원에서 전화를 회계했는데, 뇌물을 써가며 아첨하는
관리들을 모두 물리쳤다. 이 소식이 퍼져 원나라 순제가 등용하려 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고려로 돌아왔다.
충목왕 때
이사우사로 임명되고 수성익대공신에 봉해졌으며, 이어 도첨의평리로 전임되었다가, 1349년(충정왕 1)
찬성사로 승진했다. 1354년(공민왕 3) 좌정승이 되었으며, 1354년 대호군이 되었는데, 그해 원(元)나라에서
남정군을 요청하자, 유탁·염제신 등 40여 명의 장수 및 군사 2,000여 명이 함께 파견되어 원나라의
고우·사주 등지에서 장사성의 난군을 토평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호를 받았다.
이때 원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곡성부원군에 봉해진 뒤 유탁 등과 함께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다가 그해
10월에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다.
1356년 친원파를 처단한 뒤 원나라로부터 책망당할 것을 염려한 공민왕이 그를
서북면도원수로 임명하여 원나라 공격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해 수문하시중이 되어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군사들을 반년 만에 교대시킬 것과
부모상을 당하면 넉넉한 휴가를 줄 것을 청했다. 1361년 사직했다가 다시 우정승이 되었는데, 홍건적의 난 때 어머니를 버리고 피난갔다는 이유로
고신에 대간들의 서명을 받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다음해에 도첨의사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권력자인 신돈에게
굽히지 않았다. 1371년 오로산성을 정벌할 때 서북면도통사로서 전쟁에 참가한 뒤 곡성백에 봉해지고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1374년에 우왕이 즉위한 뒤 영삼사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영문하부사가 되었으며,
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 호를 첨가하여 받았다. 시호는 충경이다.
한자
: (瑞原). (佛奴). (愷叔). (忠靖公), (承益), (泰定皇帝), (尙衣使),
(征東省郎中), (翊正司丞), (浙江省), (中政院), (錢貨), (順帝),
(二司右使), (輸誠翊戴功臣), (都僉議評理), (贊成事), (大護軍),
(南征軍), (柳濯)· (廉悌臣), (高郵)·(四州), (張士誠),
(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 (曲城府院君), (柳濯), (守門下侍中),
(告身), (臺諫), (都僉議司事), (辛旽), [兀剌山城], (曲城伯),
(領三司事), (領門下府事), (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 (忠敬)
참고문헌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및 연구논문
1.
역사자료 : 충경공 염제신에 관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역사서 기록 내용을 발췌하여 연대 순으로 게재하였으니 참고하세요.(이곳을 누르세요)
2.
중시조 염제신에 대한 연구 논문 등 ①.
이희덕(李熙德, 1973) : 고려률(高麗律)과 효행사상(孝行思想)에 대하여. 역사학보 제58집 77-1-4쪽. 1973년 6월 서울 역사학회. ②. 홍영의(洪榮義, 1991) :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염제신의 군사활동(국방개혁을 중심으로) 군사 23, 91-122쪽. 1991년 12월. 서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자료게시
: '(여기를 누르세요)', 종보 제6호, 제7호 6~7면. ③. 권태원(權兌遠, 1994) : 염제신(廉悌臣). 대전문화 3. 133-138쪽.
1994년 12월 대전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자료게시 : '(여기를 누르세요)',
1. 중시조님의 일생 요약(1304-82) -고려의 문신과 무신-
충경공 염제신의 년보(1304.10.30-1382.03.18)
1304년(충열왕 30) : 10월 戊申일 출생, 도첨의중찬을 지내신 충정공 승익의 손자이며, 부친
세충과 모친 가순택주조씨의 2남, 아명은 불노(佛奴), 자는 개숙(凱淑)임
1309년(충선왕 1 ) : 6세때인 乙酉 11월 28일에 부친 대호군
염세충께서 별세하심
1314년(충숙왕 1 ) : 11세때부터 10년간 원의 고모부 말길(중서평장사)의 집에서 공부
1324년(충숙왕 11) : 21세때 원의 태정황제를 모시는 금중의 숙위로 임명됨
1326년(충숙왕 13) : 23세때 모친 방문을 원제께 고하니
금강산에 강향케하고, 금자원패를 내림
1329년(충숙왕
16) : 귀국후 원으로 다시 돌아가 상의사를 제수받음
1333년(충숙 복 1) : 30세때 순제께 귀국을 청하자 정동성낭중으로 임명 귀국, 왕의 신임받음
1340년(충혜 복 1) : 왕의 승하로 9년만에 원으로 돌아가 익정사승(품계; 봉훈대부)에 제수됨
1343년(충혜 복 4) : 40세때에 원나라의 절강성 봉명사, 중정원 회계감사, 영구 귀국
1346년(충목왕
2 ) : 43세때에 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에 제수
1347년(충목왕 3 ) : 44세때 중대광 수성익대공신호를 받고, 곧
도첨의평리, 12월에 찬성사에 제수
1348년(충목왕 4 ) : 45세때에 판판도사사에 승진되고 원에
다녀옴
1349년(충정왕 1 ) : 46세때 충정왕(1349-51),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가
됨.
1350년(충정왕 2 ) : 47세때에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 옴
1353년(공민왕 2 ) : 조일신의 사감으로 등용치 못함, 공민왕(1351-74)의 즉위로 찬성사에 복직
1354년(공민왕 3 ) :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중대광 도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상호군 영경령전사제수,
우정승판전리 영효사관사 곡성백에 봉해짐. 원나라에서 남정군을 요청하여 구원군 지휘관으로 참전, 그간의 한국관료로서는 프랑크제국(독일) 사신을 최초로 접견함,
1355년(공민왕 4 ) : 52세때에 1남 염국보 과거시험 급제
1356년(공민왕 5 ) :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친원파 처단.
원의 공격 대비 서북면 도원수가 되었고, 곧 개부 의동삼사상주국 수문하시중 상장군 판병부사 영경령전사를 제수받음.
1357년(공민왕 6 ) : 54세때에 2남 염흥방 과거시험 장원급제
1357년(공민왕 6 ) : 판리부사 영효사관사로 승진
1361년(공민왕 10) : 58세때 홍건적 침입으로 어가호종하며, 모친을 피란 못해서 파직.
1362년(공민왕 11) : 59세때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후가 됨.
1363년(공민왕 12) : 60세때에 시중에 기용되었으나, 공의 모친 상으로 사직
1364년(공민왕 13) :
1월 영도첨의사사가 되고, 9월에 서북면 도통사가 됨.
1369년(공민왕 18) : 66세때 서북도통사에 보국이 더해졌고, 공민왕이 친필 염제신상을 하사, 그후 삼중대광에 특진, 곡성백에 봉함.딸이
공민왕의 부인 신비로 책봉 됨.
1371년 : 68세때 3남 염정수 과거 급제, 세아들의 급제로
부인권씨가 진한국대부인에 봉해짐.
1374년(우왕즉위) : 71세때 영문하사 영서연사 제수 문하시중
중임. 공민왕 사망후
32대 우왕 즉위(1374-88), 광주유배.
1375년(우왕 1 ) : 72세때에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영삼사사가
되고 나머지도 전과 같이 유지
1376년(우왕 2 ) : 73세때에 원나라에서 공에게 자덕대부 장작원사 벼슬을 내림
1377년(우왕 3 ) : 74세때에 도총도감을 설치하고 5부의
병마를 훈련.
1379년(우왕 5 ) : 76세때 판문하사, 부원군으로 다섯 임금을 섬긴 원로가 되심
1380년(우왕 6 ) : 영삼사사가 되고 곡성부원군에 봉해짐.
1382년(우왕
8 ) : 3월 18일 79세로 별세, 시호는 충경공(忠敬公)으로 내려짐
1384년(우왕 10) : 목은 이색이 왕명에 의한 봉교찬 비문을 새긴 충경공신도비 건립
이상과 같은 중시조이신 충경공의 일생을 아래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것입니다.
2. 성장과정
출생
: 염제신은 원(元)의 고려 간섭기(1273-1352)였던 충렬왕때(1274-1308), 충정공
승익의 손자로서 부친 염세충과 모친 가순택주조씨의 2남으로 1304년 10월 30일 태어났는데, 출생시
부터 기모가 청수하고 체격이 장대하여 대인의 기상을 보였다(대동보, 1986).
조부는
벽상삼한삼중대광을 역임한 염승익, 외조부는 조인규이시다. 조인규는 충선왕의 장인이고, 뒷날 이성계에 의한 위화도 회군을 사전에 주도했던 조준의 증조부이시다. 한자 :
(廉世忠),(嘉順宅主趙氏=평양부원군 조인규의 딸), (氣貌),(廉承益),(趙仁圭),(趙浚)
3살때 : 제신은 3세때 무릎꿇고 앉아 젖을 먹었는데, 어느때는 어머니가 젖에 조그만 종기가 난 것을 '여기가 아프다'고 말씀하니까, 그 때부터 젖을 않먹고 죽만 먹었다고 한다.
부친은 본인이 병환이 들자 부인에게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일이 있었고, 또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우니 보통 아이가 아니오.
옛날에 태사공께서 효성이 지극하기로 알려져 특별히 정려하도록 명하였는데, 지금 이 아이가 또한 그러하니, 선조의 정신을 이어받을 것이오.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이 이 아이이니, 부인은 이 아이를 잘 기르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문헌록, 1986).한자 : 태사공(廉信若), (旌閭)
6세때 부친 별세 : 제신은 부친의 말씀에 슬프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씀을 올렸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죽게 되었음을 아시면서 왜 의원에게 물어 약을 쓰지 않으시고 가만히 누워서 천명만을 기다리십니까 ?'
부친의 병이 더욱 심해지자 제신이 '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누워 계셔서 입맛이 없으실터이니 반드시 잡수시고 싶은 것을 말씀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후 제신은 때 아닌 오이와 흰새의 알을 구해 올 정도로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제신이 6세때인 기유년 11월 28일에
부친이 돌아가셨어도 몸을 바르게하여 보통사람에 비할 바 아니었다(충경공매헌선생충효록, 문헌록, 1986).
10세때 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함 : 제신은 어머니가 보기에 글을 배우지 않는 것이 민망하게 여겨 원에 계신 고모부 말길의 집에서 공부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런데, 말길 역시 제신의 재주와 사람됨을 듣고 있던 터라, 사람을 보내 제신을 데려 오게 하였다.
그랬더니 제신은 '내가 떠나 버리면, 어머니는 누구와 의지해 사시겠습니까 ? 길은 멀고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서 소식을 듣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제신에게 '어려서 배우는 것은 뒤에 커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또 사람이 출세하여 명예를 드날리는 것이 지극한 효도라고 하였는데, 네가 왜 가지 않으려고 하느냐 ?'라고 말씀하니, 제신은 마지 못해 원에 공부하러 가기로 결정했다(충경공매헌선생충효록 : 문헌록, 1986).
3. 원에서의 성장 및 관료생활
원에서 공부 : 제신은 11살때(1314년)에 모친의 말씀에 따라 원의 고모부 말길의 집에서 북학을 공부했다. 이 때 말길은 조카 염제신에게 덕행이 높은 선비들을 가려서 가르쳤으며, 제신은 덕행과 기국이 어엿하게 성취되어서 이미 어른스러웠다(문헌록, 1986).
황실 금중숙위 : 제신은 21살때(1324년) 태정황제(泰政黃帝) 즉위식에 고모부 말길과 화림에서 어가를 맞이했다. 황제는 제신을 만나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서 총애를 받아 금중숙위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제신에게 자덕(資德)의 직함으로 지위와 명망이 높도록 지극히 돌봐주었다.
한자와
해설 :
(嘉順宅主趙氏), (末吉, 中書平章事=부수상급), (北學), (御駕),
(禁中宿衛=황실근위대)
황제는 대신 말길을 가장 신임하여 혹시 말길이 몸이 아파서 조정에 못 나오면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제신에게 명하여 말길의 집에 가 자문받아 오던가, 말길이 황제에게 전할 내용은 반드시 제신을 통해 전달하도록 제신은 황제의 아낌을 받았다(문헌록, 1986, 276-296).
정동행중서성 : 고려 25대 충렬왕은 원의 지나친 내정간섭을 받게 만들었다. 충렬왕은 원종의 장남, 연경에서 1274년 원 세조(쿠빌라이)의 딸 홀도로계리미실과 결혼한 원의 부마로서, 1274년 6월 원종이 죽자 귀국한 39세 즉위 무렵 고려는 급속히 식민지로 전락했다.
원은 일본 정벌 목적으로 1280년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일본정벌 포기 이후에도 존속시켰다. 정동행성 책임자 '좌승상'에는 자동적으로 '고려왕'이 임명되도록 만들었고, 왕은 오직 관리들만 임명할 뿐이었다. 원은 정동행성을 통해서 고려와 원과의 연락기관 또는 고려의 정치를 간섭하고 있었다(이기백, 1984).
한자와
해설 :
(忠烈王: 1274-1308), (征東行中書省 약칭)
4. 3차례 귀국 및 원에서의 행적
1차 귀국 : 염제신(23세)은 고국을 떠난 지 12년만인 1326년 27대 충숙왕때 원의 태정황제에게 모친의 안부를 살피고자 귀국을 요청했다. 이에 황제는 제신의 효성에 감복하여 다녀오되, 반드시 금강산 관광을 명하면서 금자원패를 내렸다.
이것은 제신의 행차를 훌륭하게 꾸며줌으로써, 제신으로 하여금 원나라에 빨리 돌아오도록 한 배려였다. 제신이 고려 조정에서 일할 때에 원의 사신들이 고려재상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수령보기를 짐승처럼 취급했었다.
그러나 제신은 원황제의 봉명사신으로서 오직 재상들과 관장들에게 예로써 대하여 칭송을 받고 있었다. 제신이 원에 되돌아오자 황제는 제신에게 상의사를 제수했다(문헌록, 1986).
한자와 해설 :
(金剛山), (金字圓牌), (奉命使臣), (尙衣使=왕의 옷과 궁내옷감을 관장)
2차 귀국
: 1331년 제신(28세)은 2차 귀국때(28대 충혜왕, 1330-32, 39-44)도 언행을 더 삼가고 조심했다. 이를 본 고향의 노인들이 "나이는 비록 젊지만 어른 못지 않다. 이 사람이야 말로 조부 문하시중(염승익)의 손자요. 외조부 문하시중(조인규)의 손자임이 분명하도다"라고 감탄했다(대동보, 1986).
3차 귀국 : 제신의 나이 30세이던 1333년, 3차 귀국때(충숙왕때)는 황제로부터 정동성낭중에 임명되었다(대동보, 1986).
정동성낭중 염제신은 고려 조정에서 원의 벼슬을 빙자하여 방자하게 구는 동료들의 심한 농간을 극력 저지하는 한편 토지와 노비, 농민들의 송사일체를 관계당국의 유사에게 돌려서 처리함으로써, 충숙왕이 "염낭중(廉郎中)은 참으로 청백하고도 검소하도다"라는 칭찬과 신임을 했다(문헌록, 1986, 754-770).
충숙왕은 충선왕(1275-1325)의 2남, 줄곳 원에 있다가 충선왕의 양위로 20세에 즉위했다(고려왕조실록, 박영규, 1996).
원에서의 행적 : 제신 나이 37세(1340년)인, 고려 체류 9년만에 충숙왕이 죽자, 원에 불러들여 익정사승을 제수했다. 제신이 40세(1343년)때는 강소성과 절강성 봉명사로 중정원의 회계감사를 할 때 관리들이 많은 뇌물로의 아첨을 하였는데 일체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승상 별가불화가 황제에게 말씀드리니, 황제는 제신의 청백함을 알고 장차 크게 쓰려고 점찍을 즈음 고국의 모친이 중병을 앓고 계셨다. 원에서의 염제신의 품계는 자덕대부, 장작원사였다(문헌록, 1986).
한자와
해설 : (翊正司丞=품계 봉훈대부).
(奉命使=특명전권대사), (中政院), (別哥不花), 황제(順帝, 1333-38; 고려여인 기황후 남편),
(資德大夫), (將作院使)
5. 염제신의 행적(공민왕과 우왕 때)
좌정승, 우정승, 곡성부원군 : 염제신은 공민왕때인 1354년(51세) 좌정승, 우정승,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의 호가 내려졌다. 당시 정승은 채하중, 제신은 관직을 물러나서 곡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대동보, 1986).
(고려사 : 곡성부원군 염제신 : 통권 38권 世 38권-22쪽 뒤7, 통권 89권 傳 2권 33쪽 앞1, 통권 111권 전 24권-2쪽 뒤1, 통권 126권 전 39권-27쪽 앞5, 열전 39권 27쪽 앞5).
한자 :
(左政丞),(右政丞),(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蔡河中),(高麗史),(曲城府院君 廉悌臣)
원나라의 내란에 원병 지휘관으로 출정 : 염제신이 고려에서 서정쇄신하던 때 원의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인접 국가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다(박영규, 1996).
염제신이 곡성부원군으로 봉해진 1354년 6월 원에서 고려에게 원병을 요청해 왔다. 이에 염제신은 최영, 유탁등 장수 40여명과 군사 2천여명을 이끌고 원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염제신이 지휘관으로 원나라에 체류하던 1354년에 공민왕이 원에 사신을 보내 제신의 귀국을 요청하니 원황제는 10월에 제신은 고려대신이라면서 휘정원에서 극진한 예우로 잔치를 베풀고 귀국을 허락했다고 한다. (대동보, 1986).
한자 :
崔瑩), 유탁(柳濯), (高麗大臣), (徽政院)
1354년 염제신의 프랑크제국 대사 최초 접견
: 염제신은 원에 지휘관으로 출정중이던 1354년 한국관료로서는 최초로 프랑크제국(독일)의 사신을 만났다는 기록이 나타났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역사상 고려와 독일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 접촉이었다. 그후 한국과 독일과의 교류는 문헌상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 뒤에는 19세기까지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세력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할 무렵 접촉이 재개되었다.
즉, 조선의 문호개방정책에 따라서 1882년에 한독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수교하여 1883년 무렵 묄렌도르프 등 독일인이 조선에서 활동했다가 일제시대에 중단되었다가 1955년 12월 1일 한국과 서독이 서로간에 국가를 인정하고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http://www.nobelmann.com/history/deutsch/gerhistory11.htm)
한자 : (李粹光), (芝峰類說), (韓獨修好條約)
서북면도원수 : 공민왕은 1356년 반원정책에 따라 원의 세력을 업고 권세와 횡포를 부린 친원파를 제거 후 원의 견책을 두려워하던 중 염제신(53세)을 서북면도원수, 유연과 김지순을 부원수로 보좌케하고 제신에게 "염공은 나에게 만리장성이니 경이 떠난 후 내가 북쪽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대동보, 1986).
서북면 도원수 염제신은 만약을 대비하여 성을 구축, 군비를 강화, 군사들을 지휘할 때,
군량과 말먹이를 첫째로, 성곽 수리를 둘째로, 병기 정비를 셋째로 삼았다.(문헌록, 1986).
염제신은 마음에 모든 책략이 정해 있었지만, 부하의 뜻을 존중하는 뜻으로 부사 최영과 의논한 후에야 결정내렸다.
(문헌록, 276-296) 한자 :
(西北面都元帥), (柳淵), (金之順), (廉公), (副使= 종4품)
수문하시중
: 공민왕은 1356년 11월 염제신에게 수문하시중을 제수하여 제신이 재삼 사양해 허락받지 못했다. 이 때에 요승 신돈과 간신 김흥경 등이 여러번 모함했지만 공민왕은 끝까지 염제신을 신임했다.
당시 익제 이재현은 문하시중, 염제신은 수문하시중, 이색은 이부시랑이었다(문헌록, 1986).
한자 :
(守門下侍中=종1품/부총리), (辛頓), (金興慶), (李齋賢),
(李穡), (吏部侍郞=정4품/부이사관)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후 :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 침략으로 경기 광주와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 1362년 봄 왕은 염제신(58세)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을 제수했고, 곡성후로 봉한지 얼마 안 되 홍건적이 개성을 함락하여 공민왕이 충청도와 경상도로 몽진(임금님의 피란)할 때 염제신이 어가를 모셨다.
1363년 1월 홍건적 평정후 공민왕이 청주에서 개성으로 돌아왔다. 염제신이 여러 재상과 '흥왕사'에서 축수의 잔을 올리자 공민왕은 "뜻밖에도 오늘에야 송도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경들의 공이로다"라고 말씀했다(대동보, 1986).
한자 :
(璧上三韓三重大匡=정1품), (曲城候) 흥왕사=(1067년 개성 덕적산에 건축, 문종의 원찰, 초대주지는 대각국사 의천/義天)
우정승, 영도첨의사사, 삼중대광, 곡성백 : 공민왕은 1363년 3월 제신(59세)에게 우정승을 제수, 최 영은 판밀직사, 그후 영도첨의사사, 삼중대광으로 특진, 곡성백으로 봉해졌다
(대동보,1986); 고려사 : 곡성백 염제신(曲城伯 廉悌臣)-통권 39권 세39권-10쪽 앞9, 통권 43권 世43권-9쪽 앞1, 통권 64권 志18권-36쪽 뒤7, 통권 111권 傳24권-4쪽 앞3. 한자 :
(右政丞=정1품), (判密直事), (領都僉議司事), (三重大匡=정1품),
(曲城伯)
노국공주 사망 : 공민왕이 왜구의 침입과 정국의 혼란으로 백성들이 불안해 할 때에 설상가상으로 개인적인 슬픔이 생긴 것은 1365년 2월 만삭의 노국공주가 산고로 죽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생애는 노국공주의 생존시기와 사망시기로 구분될 정도로 노국공주가 절대적 존재였다.
즉, 공민왕에게 있어서 14년간 다정불심이던 노국공주의 죽음은 계속되던 전란과 맞물려 더욱 인간적인 실의와 예술가적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다(고려왕조실록. 박영규, 1996).
서북도통사, 문하시중 : 염제신(66세)은 1369년 서북도통사로서 요녕성 환인(만주) 서북쪽에 원의 세력이 남아있던 올라성을 정벌할 때, 지휘관이 적들을 많이 죽이지 못하게 했다. 염제신은 전쟁을 끝내고 개선한 후 문하시중이 되었고, 품계에 보국이 더해졌다(대동보, 1986). 한자 :
(西北都統使), (兀羅城), (門下侍中), (輔國)
고려때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제도적으로 양자는 동일한 지위를 누렸지만, 실제로 문반이 무반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전쟁이나 내란이 있어났을 때도 군대통수권은 문반이 가졌고, 무반은 전투에 참가하는 기술적인 실무자에 불과했다(박종기, 1999).
당시 상서성의 복야나 6부의 상서가 참지정사를 겸하면서 재상이 되었고, 중서시랑평장사나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하여 상위 재상이 되었으며, 문하시중이 되면서 최고관직에 올라섰다(고려시대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한국역사연구회, 청년사, 1997).
신돈의 득세 및 개혁 : 신돈은 1359년(공민왕 8) 무렵 김원명의 천거로 중앙에 등장했다.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공민왕(14년)이 그의 신임을 받던 신돈에게 6년 동안(1366-71년) 정권을 내맡기고 조신들을 견제케 한 후 노국공주의 명복을 비는 불사에만 전념할 동안 신돈의 힘이 막강해졌고, 6년 동안 권세를 부렸다(박영규, 1996).
신돈은 집권 초기에 우선 최영을 비롯한 무장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기존 권문세족 모두를 대상으로 한 인사개편을 대대적으로 착수했다. 이로써,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같은 신진사대부들이 신돈 정권 참여를 계기로 차츰 성장했고, 일반민을 위해 개혁을 추진한 그는 당시 '성인'이라고도 불렸다.
신돈의 개혁작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 잡기 위한 전민변정도감의 설치였다. 이로 인해 개혁의 일정 부분이 성공하던 중 공민왕은 왕권이 어느 정도 강화됨으로써, 1371년 왕권에 버금가는 신돈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해 버렸다(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청년사, 1997).
한자 :
(辛旽, 승명/편조, ?-1371), (李穡), (鄭夢周), (鄭道傳)
신돈의 모함, 동북면도통사, 신비염씨 : 신돈은 집권기에 염제신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밉게 보고 공민왕에게 참소하고 모함했어도 제신은 끝끝내 듣지 않았다. 그러나 공민왕은 당시로서는 신돈이라는 인물을 더 많이 신임을 해서 결국 제신의 아들들과 사위들에게 명하여 신돈과 관계를 끊지 말도록 타일르기도 했다.
제신(68세)이 신돈의 모함으로 6년 동안이나 집에서 쉬던 중 1371년 동북면도통사로 임명된 것은 공민왕이 요승 신돈을 처형 후 과거 중신들 모두의 소환에 따라서 재기용되었다. 그리고 1371년 제신의 4녀가 공민왕 5번째 왕비 신비염씨로 책봉되었다.(대동보, 1986).한자 :
(東北面都統使), (愼妃廉氏)
문하시중, 광주 유배 : 공민왕은 1374년(공민왕 23)에 문하시중 이인임 파면 후, 염제신(71세)을 문하시중으로 5년후 또다시 중임하여 품계도 전과 똑 같이 해주었다. 1374년 6월 제신이 광주로 유배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명 사신 채빈의 비위를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채빈은 성질이 포악해서 사람을 때리고 욕하기를 좋아하여 시중과 여러 재상들이 수모를 당했었다(대동보, 1986).한자 :
(李仁任), (廣州), (蔡斌),
영삼사사, 도총도감, 판문하사 : 공민왕은 1374년 9월 갑신일 최만생, 홍륜 등에게 살해당했다(박영규, 1996). 염제신(71세)은 우왕때(1374-88) 계속 영삼사사, 판개성겸감춘추관사, 곡성부원군,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영삼사영경연사, 도총도감, 판문하사를 역임했다. 이는 염제신이 30여년간 중신으로서 다섯 임금(충숙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을 섬긴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대동보, 1986). 한자:
(領三司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領三司領經筵事)
고려명신(高麗名臣) 염제신
: 염제신은 1800년대의 고려명신전에 의하면, 고려명신들 중에서 제1인으로 기록되어 있다(고려명신전 9권 : 남공철, 1822년/순조22년 발간, 서울대학교 규장각)
중시조님의 시(詩) : 1379년(우왕 5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문(普濟尊者 石鐘碑文-국보357호)에 명기되어 있고, 왕사 나옹(王師 懶翁, 공민왕의 스승)스님이 중시조님께 주신 시구(詩句)가 나옹록(懶翁錄)에 전해진다.(종보 12호 6면
'나의 생각 타인의 생각'. 벽강).
이를 근거로 나옹록에서 다음과 같은 두편의 시구를 찾을 수 있었다(염태호).
염시중(廉侍中)에게 주는 글
지극히 존귀하고 높으신 분
숲속으로 이 가난한 도인을 찾아오셨네
오늘에 존귀한 몸 무엇하러 오셨던가
세세생생에 나와 함께 참됨(진)을 닦기 위함이리라
본래 완전히 이루어져 말에 있지 않거니
어찌 수고로이 입을 열어 그대 위해 말하랴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화두를 들어
위음왕불을 번뜻 밟으면 벌써 저쪽이리라.
(출처 : 나옹록)
또 東文選에 있는 중시조 염제신에 관한 시 1수를 소개합니다(염 태 호) 동문선 제2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염시중제신제분매(廉侍中悌臣第盆梅) 한 번 보자 처음으로 눈이
깨끗해짐을 놀랐나니 / 一見初驚眼不塵 푸른 바지 흰 소매로 사람을 비춰 새로워라 / 靑裙縞袂照人新 창 밖의 바람과 눈은 헛 발악이라
/ 隔窓風雪徒爲惡 분매ㆍ화당을 향해 이미 봄을 알려 주네 / 好向華堂已報春
다음은
'신증동국여지승람 16권 충청도 보은현 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대동보 문헌록 884쪽)
염제신(廉悌臣)의 시
:
筆落珠璣字字香 遏雲歌裏引盃長 半酣更覺君恩重 坐到深更冷欲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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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락주기자자향 알운가리인배장 반감경각군은중 좌도심경냉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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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에서 구슬이 떨어져 글자마다 향기로우니, 맑은 노래소리에 술잔 길게 드네.
반쯤 취하자 다시 임금의 은혜 중대함을 깨달으며, 밤 늦도록 앉았으니 서리 내릴 듯 밤도 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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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님의 친필 서한문
筆史大觀(國民意識正立 思想 敎養本)
謹拜 審此來 靜體萬寧 仰慰 且領 弟-依 昨狀 幸私就 政事每日 付送云 意吉依敎分付爲計矣 餘留不備 謹謝禮 生 悌臣再拜
(삼가 절하고 살피옵건대 이즈음 靜體(상대방에 대한 존칭)가 만번 안녕하시다니 위안이 되며 또 칭송합니다. 弟는 한결같이 지난날의 모양과 다름없으니 다행인가 합니다. 政事(인사관계의 일)에 있어서는 매일 부쳐 보낸다 하니 意吉(사람 이름인 듯)의 가르킴에 따라 분부할 계획입니다. 나머지는 남겨두고 갖추어 쓰지 못합니다. 삼가인사 드립니다. 生 제신재배) -성대 임형택교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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