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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충부자형제란
: 임진란때 의병을 일으켜 장렬하게 싸우시다가 순국하신 한 가족
네 분을 일컫는데, 12세이신 퇴은당 염걸, 정헌공 염서, 절재공 염경
삼형제와, 염걸 장군의
아드님 13세 강재공 염홍립을 말하며, 이 분들께서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하여 싸우시다가 모두 전사하시었다.
퇴은당 염걸 장군(退隱堂 廉傑, 1545-1598)
公의
字는 國忠이시고 호는 퇴은당이시다. 1545년 4월 15일에 강진군 칠량면
율변리에서 아버지 어모장군 副司果 휘 仁亨과 妣 숙인 김해김씨의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할아버지는 展力副尉 折衝장군 휘 장민이시고 公은 중시조
충경공의 11대손이시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뛰어나고 총명하며 단정하였다. 전 현감이었던 김광준에 수학하여
효심도 지극하여 이웃의 칭찬이 많았다. 어려서 '꽃에 나는 벌은 임금님의
기상이요 춤추는 나비는 임금님의 정일세'이란 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고, 한번은 집에 도둑이 들어 양식 등을 훔쳐가는 것을 보고 여러
구실로 접근해서 도둑의 옷자락에 먹칠을 해놓아 후일 이웃마을에서
무례한들을 검거케 하는 기지를 발휘해 이 지방에서 칭송의 표적이
되었다.
무예에도
탁월하여 늘 아우인 瑞와 慶은 물론 아들 홍립에게도 병서를 강론하고
무술을 연마케하여 부근에서는 4장군이란 말이 펴졌다. 임진란이 일어나
왜병이 강진 구십포에까지 침입해 방화, 약탈과 학살 등 참사가 전해지자
공은 의분하여 동생과 아들에게 국가위난의 실정을 알리고 목숨바쳐
항전할 것을 다짐하고 부근 고을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무기와 장비가
없어 골몰하다가 현청의 장적으로 병사의 갑옷을 만들고 손수 병기를
제작하여 대나무에 의병의 기를 달고 출진하게 된다.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적의
선박 가까이 접근해서 위계를
써서 적군에게서 많은
화살을 얻고, 모여진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수정사에 진을 치고 격문을
돌려 의병을 더 모으는 한편, 고을 주변의 적과 상대하여 열등한 장비와
적에 비해 적은 수의 병력임에도 지형을 이용하고, 때를 가려 적을 기습하고
요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장비를 노획하였는 바 분개한 적이 1592년
9월 24일에 많은 병력으로 몰려와 고을 요소를 포위하며 공격해왔다.
이때 막내 아우 慶이
전사했다(이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公을 비롯 의병들은 더욱
분발하여 적을 무찔러 적병 수백을 죽이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이때
즈음 연해의 많은 고을들이 적에게 짓밟히고 의병들은 패퇴하였는데도
오직 강진지역만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公이 거느린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이때
통제사 이충무공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고 칭찬하며 1597년
11월 18일에 公을 의병장으로 임명하였다. 얼마후 왜군이
장흥 회령진 대흥교에 진격하여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공의 진영에서
불과 20리 떨어진 곳인지라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우선 의병을 몇 개로
나누어서 지형을 이용하여 요로에 매복케하고, 스스로는 야음을 타서
적진에 불을 지르며 기습하여 많은 적병을 사살하였고 달아나는 적병들도
요소에 매복한 의병에 의해 섬멸됨으로서 이후 근처에서는 왜적의 준동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후
충무공 본영에서의 令에 의해 공이 이끄는 의병이 영남 방면으로 진격하게
되었고 예교(曳橋)에서 적과 대전하여 세 번이나 싸워 큰 전과를 거두게
되자 이충무공은 더욱 공을 칭찬하고 공에게 정병 300명을 더주며 격려했다.
얼마후 몰운대 싸움에서 왜장 두명의 작전에 말려 李충무공의
아들 면이 전사하였을 때 이충무공이 비통해 하는 것을 보고 公은 용감히
출전하여 치밀한 작전술로서
적장 “마희움”을
사로잡고 宋여종, 宋希立과
합세해서 나머지 적장
“마다치”를 생포해서
보고하니 忠武公은
자식의 치욕을 씻었다며 公의 공로를
격찬하고 전과를
조정에 상계 함으로서 守門將에 임명되었고 또 司僕寺主簿로 되었다. 그후 忠武公과 함게 노량해전에 참여하여 적선 수십척을
부수고 적장
1O여인을
살해하는 등 큰 공로가 있었으나 이 싸움에서 忠武公이
전사함으로서 公의 공로는보고되지 않고 말았다. 믿었던
忠武公을 잃고 公은 허탈해지고 의병의 사기도 떨어졌으나
나라를 구한다는
사명을 저버릴 수 없어 의병들을 독려하여 곧 거제에 진주하여 적의
대군과 싸워 여러번 전과를
올렸으나 파상적으로 몰려오는 적군의 끈질긴 응전에 사력을 다하여 분전하다가
1598년 11월 어느날 적탄을 받고 전사하셨다.(享年 54세).
같은 날 아우 瑞와 아들 弘立도 함께
전사하니 살아남은
모두가 이 충절에 고개를 숙였다. 公이
전사한 후 시신을 찾지 못하고 公의 옷과 신이며 의발 치아의 초혼으로 강진군 七良面
단월里 율변촌(옛 佛舞洞)에
장사지냈다. 공의 배위 정부인 경주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홍립이 있고
아들 홍립의 배위 숙부인 김해김씨와의 사이에 득길, 득서 두 형제와
2녀를 두었다.
선조 38
을사 4月 16日(서기 1605년)에 公과 아우 瑞 및 아들 弘立에게는 宣武原從二등功臣이 수훈되고 그후 公에게는 資憲大夫 병조判書, 아우
瑞에게는 병조參議, 막내아우 慶에게는 통정大夫 承政院副승지,
아들 弘立에게 이조참의의 벼슬이 추증되었고 公의
창의지인 율변촌萬老松밑에
四忠순절비가 세워졌고 1950년 11월에 退隱堂실기가 刊行 되었으며 1955년 7월에 포충정려가
건립, 1963. 2. 27에 四忠각이 건립되고 1970. 3월에는 四忠臣을 향사하는 유천사가 세워졌고 1978.
9. 22에는 四忠臣 묘역이 全羅南道文化財 36號로 지정되며
1983. 4. 28에는 묘정비가 건립되고
1985. 3월에는 四忠閣과 숭의문과
사충문이 보수되었다. 참고문헌 退隱堂遺事, 행록
月波鄭時林
撰 義兵將 退隱公 행적, 古今島戰勝碑 金陵誌 湖南節義錄 三綱錄 仕臣錄 宣武原從功巨抄略, 守門將廉傑錄差抄 義兵將 守門將公行蹟-瑞 義兵主簿公行蹟-弘立 旅閭事實 勉庵 崔益鉉
임진왜란때
이러한 선조님들의 희생이 있음으로 해서, 고려말 무진참화로 누명을
쓴 불운의 가문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 후손들은 기억하고,
더욱더 조상 숭배에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2000.1월 염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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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공
염서 장군(貞軒公 廉瑞)
: 장군은 파주염씨 12세로 임진란때 의병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출장하여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병들과 장렬하게 싸우시다가 거제도에서 순국하신 장군이신데, 형님 퇴은당 염걸, 동생 절재공 염경,
조카인 강제공 염홍립(형 염걸 장군의
아드님)과 같이 네 분이 함께 싸우시다가
모두 순국하여 이 네 분을 4충이라 칭하며, 묘소는 전남 강진에 모셔있다.
염서 장군은 강진군 칠량면 율변리에서 출생하셨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남해안 일대에 침입하자 이순신장군으로부터
의병장으로 등용되어 강진, 장흥, 광양, 노량해전, 거제도에 이르기까지
왜적의 진지가 있는 곳마다 수많은 의병을 지휘하고 왜적을 격파하여
연전 연승 대첩을 거두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왜적을 추격하는 백병전에서
1598년 50세때에 순국 전사하셨다. 이
혁혁한 전공 과정을 인정한 이순신장군과 도원수 권율 장군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조정에서는 염서 장군에게 贈 통정대부 병조참의의 벼슬과
포충(褒忠)이란 정려(旌閭)를 지어 포상하고 배향토록 교지를 내리었다.
☜ 정헌공 염서장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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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통정대부 병조참의 파주염공서충의비(贈通政大夫 兵曹參義 坡州廉公瑞忠意碑)
공(公)의 휘(諱)는 서(瑞)요 자는 국망(國望)이요 호는 정헌(貞軒)이다 공의 선계(先系)를 소고(溯攷)하면 시조(始祖)는 고려 삼한공신대사도 휘 형명(高麗三韓功臣大司徒諱邢明)이요 휘 위(位)를 생(生)하니 군자감승(軍資監丞)이요 휘(諱) 가칭을 생(生)하니 병마사(兵馬使)요 휘 현(諱顯)을 생하니 재상(宰相)이요 휘 한(諱漢)을 생(生)하니 병부상서(兵部尙書)요 휘 덕방(諱德方)을 생(生)하니 검교우복사(檢校右僕射)요 휘 신약(諱信若)을 생(生)하니 정당문학 시 효문공(政堂文學諡孝文公)이요 휘(諱) 극모를 생(生)하니 호부시랑(戶部侍郞)이요 휘(諱) 후(珝)를 생(生)하니 저시문(著詩文)하고 휘 수장(諱守藏)을 생(生)하니 예빈경(禮賓卿)이요 휘 순언(諱純彦)을 생(生)하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요 휘 승익(諱承益)을 생(生)하니 도첨의중찬 시 충정공(都僉議中贊諡忠靖公)이요 휘 세충(諱世忠)을 생(生)하니 대호군(大護軍)이요 휘 제신(諱悌臣)을 생(生)하니 문하시중 충경공(門下侍中忠敬公)이니 중세(中世)의 기세조(起世祖)다.
휘 국보(諱國寶)를 생(生)하니 서성군예문관대제학(瑞城君藝文館大提學)이요 휘 치중(諱致中)을 생(生)하니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요 휘 이(諱怡)를 생(生)하니 첨지통례문사(僉知通禮門事)요 휘 순공(諱順恭)을 생(生)하니 호(號)는 미곡(薇谷)이요 지평(持平)을 제수(除授)했으나 불취(不就)하고 나주금성산하(羅州錦城山下)로 옮겨 유문(儒門)에 큰 공로(功勞)가 있었으니 이 분이 공의 7대조(代祖)다 6대조의 휘(諱)는 기(紀)니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이요 5대조의 휘(諱)는 효증(孝曾)이니 진사(進士)요 고조(高祖)의 휘(諱)는 수거(壽擧)이니 통례원찬의(通禮院贊儀)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자중(自重)이요 조고(祖考)의 휘(諱)는 장민(將敏)이니 절충장군(折衝將軍)이요 황고(皇考)의 휘(諱)는 인형(仁亨)이니 어모장군(禦侮將軍)이며 황비는 숙인김해김씨(淑人金海金氏)니 조선 명종(朝鮮明宗) 4년 기유(己酉) 6월 5일에 공을 강진군 칠량면 단월리(康津郡 七良面 丹月里)에서 출생했다.
공은 천품(天品)이 높고 효애(孝愛)가 지극하여 친상(親喪)에 형 판서공 걸(兄判書公傑)과 여묘(廬墓)하여 종상(終喪)을 했고 조선 선조 임진년 왜적 침입(朝鮮宣祖壬辰年倭賊侵入)으로 전국토(全國土)가 약탈당(掠奪當)함에 의분(義憤)하시어 충의정신(忠義精神)과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형제가 의합(意合)하여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였는데 의사(義士)가 흠모(欽慕)하고 운집(雲集)하여 병세(兵勢)가 대진(大振)했다 때마침 적선 수십쌍(敵船數十雙)이 강진 구십포(康津九十浦)에 침입(侵入)했다는 보고(報告)를 접(接)하고 즉시 출동(卽時出動)하여 그들의 상륙지점(上陸地点)에 가병(假兵)을 세우고 유인(誘引)하여 섬멸(殲滅)을 했으며 다시 승전(勝戰)의 여세(餘勢)를 몰아 동군 대구면 정수사(同郡大口面淨水寺)에 내둔(來屯)한 적(敵)과 교전(交戰)을하여 대파(大破)했는데 이 전투(戰鬪)에서 제씨 승지공 경(弟氏承旨公慶)이 전사(戰死)했다 이 소식(消息)을 전해들은 통제사 이충무공(統制使李忠武公)은 공 형제를 장(壯)하게 여겨 의병장(義兵將)으로 호칭(呼稱)하고 상호협력(相互協力)을 다짐했다 이로부터 육해(陸海)에서 연합전선(聯合戰線)을 펼쳐 몰운대(沒雲臺)에서 대승(大勝)을 거두고 장질 이조참의공 홍립(長姪吏曹參義公弘立)도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왜교성(倭橋城)에 이진(移陳)하여 적(敵)을 대파(大破)하니 이충무공(李忠武公)이 사실을 도원수(都元帥)인 권공(權公)에게 고(告)하고 권공은 이를 장계(狀啓)로 조정(朝廷)에 아뢰니 삼공(三公)에게 각기 수문장(守門將)의 직첩(職帖)이 내려졌다
그리고 무술년(戊戌年)에 형제와 질(姪)이 모두 거제도(巨濟島)의 접전(接戰)에서 일시(一時)에 전몰(戰歿)하니 사실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백씨 걸(伯氏 傑)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공은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제씨 경(弟氏 慶)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질 홍립(姪 弘立)은 이조참의(吏曹參議)로 각히 증직(贈職)이 되었고 모두 정려(旌閭)가 명(命)해졌다 그리고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으로 책록(策錄)되고 녹권(錄卷)이 내려졌으며 4충순의비(四忠殉義碑)도 세워지고 모든 공문적(公文籍)에도 두루 등재(登載)되고 화순군 이양면 오류리 오천사 4충각(和順郡 梨陽面 五柳里 柳川祠 四忠閣)에 향사(享祠)되었다 공은 유의(遺衣)로 초혼(招魂)하여 강진군 칠량면 송촌리 후 법수현 유좌원(康津郡 七良面 松村里 後 法守峴 酉坐原)에 입묘(立墓)가 되었는데 뒤에 동면 단월리 율변촌 우불무동 진좌원(同面 丹月里 栗邊村 右佛舞洞 辰坐原)으로 이안(移安)을 했고 광복후 무신년(光復後戊申年)에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제36호로 지정되었다 배위(配位)는 광산김씨 참봉세영녀(光山金氏 參奉世榮女)와 진주강씨(晋州姜氏)인데 공과 합장(合葬)되었다 1남(一男)은 홍건(弘健)이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요 손 이징(孫以澄)은 승사랑(承仕郞)이요 이화(以華)는 훈련원첨정 증통정대부(訓鍊院僉正 贈通政大夫)요 손서(孫壻)는 한양조정익(漢陽趙廷翊)이다 증손 경수(曾孫 慶守)는 장방출(長房出)이요 경후는 차방출(次房出)이니 종형제(從兄弟)가 처음이곳 보성군 복내면 용동리(寶城郡 福內面 龍洞里)에 래거(來居)하여 于今 250여년이 지나 자손(子孫)들이 이곳 토착인(土着人)이 되었다
바야흐로 공의 충의비(忠義碑)를 보성군 복내면소재지(寶城郡 福內面所在地)에 세우기로 추진위원회(推進委員會)가 의결(議決)했는데 10세손 길섭 태섭(吉燮 台燮)이 재원부담(財源負擔)과 주동역할(主動役割)을하고 동향인여(同鄕人余)에게 기문(記文)을 청(請)해왔다 내 공(公)의 선세(先世)가 초조(初祖)부터 관작(官爵)이 연세(連世)하고 또 국난(國難)에 일문 4충(一門四忠)이 옥쇄입근(玉碎立僅)함에 감탄(感歎)하여 사양(辭讓)치 않고 위와 같이 서술(敍述)하오니 자손(子孫)들은 현조(賢祖)의 명행(名行)을 숭모(崇慕)하여 계승(繼承)을 다짐하고 행인(行人)도 이 충의비문(忠義碑文)을 읽고 충혼(忠魂)에 경의(敬意)를 표(表)하여야 할 것이다.
단기 4331년 戊寅 6월 일 謹竪 성주이백순(星州李栢淳)은 짓고 여산송태경(礪山宋泰炅)은 쓰다
헌성비(獻 誠 碑)
友石文化財團理事長 廉吉燮 參億원 國家補助金 貳億원 現代放射線科院長 文武昌 五百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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