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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인물

조선시대 파주염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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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별

역사속의 염문 선조님들

참고 자료

조선시대
인 물 편

廉致中

廉致庸

廉   怡

廉順恭

廉   紀

조선왕조실록
창의록, 동국 사환록 등

廉孝騫

廉山國

廉友赫

廉誠立

廉得水

廉季達

廉奉洙

 

 

 

동학농민운동사 등

  ◇ 조선시대의 역사적 인물들

 3세 염치중(廉致中)

   高麗史-廉致中 : 통권 126권 전39-25쪽 앞6, 44권 세44-21쪽 앞6.
송은공 염치중은 2세 염국보의 장남, 출생은 대략 1350-60년 전후일 듯, 아내 함양군부인박씨, 슬하에 염 이를 두셨다. 치중의 묘소는 충북 옥천, 제향지는 1852년 사림의 노력으로 나주금강서원장성경현사다(문헌록, 1986).
한자 : (松隱公 廉致中), (廉國寶), (咸陽郡夫人朴氏), (廉 怡), (士林), (羅州錦江書院), (長城景賢祠)

정몽주의 문하생 : 염치중은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정몽주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성리학을 바탕으로 충효에 독실함을 근본으로 삼으며,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당대 사림에서 그를 부러워하고 칭찬했다(대동보, 1986).  
한자
: (鄭夢周, 1337-92), (士林)

과거급제 및 관직 : 염치중은 정몽주로부터 수업받은 후 도학을 잘 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고, 1375년(우왕 1)에 과거시험에 합격,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상의회의도감사, 상호군, 판종부사사를 지냈다(대동보, 1986).
한자 : (道學), (奉翊大夫=종2품), (同知密直司事), (商議會議都監事), (上護軍=정3품),  (判宗簿寺事)

  고려 후기 사대부 앞에 놓인 두 길

  고려의 충신이냐 조선의 공신이냐 ? : 고려 후기의 사대부들은 조선의 건국을 둘러싸고 정치적인 행보가 달라졌다. 우리나라 유학의 종장이라는 이색, 선죽교에서 맞아 죽은 정몽주, 이숭인 등 많은 사대부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
성씨들의 문중에서 흔히 '자랑스런 조상'으로 받드는 "두문동 72현"도 같은 길을 간 사람들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서 절의를 다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도덕에 충실했던 인물로 평가하였다.

반면 고려말 최고의 경세가라는 정도전, 조준 및 윤소종 등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 왕조 조선을 세웠다. 바로 이들은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권세가를 비판하고 정적을 가차없이 숙청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한국역사연구회, 청년사, 1997)

  두문동 72현  (杜門洞 72賢)
   
염치중과 염이 : 염치중은 1388년 부친 염국보의 별세로 인해 가문몰락의 후유증을 처음으로 겪은 불세출의 인물이셨다.
즉, 염치중은 아들 염이를 데리고 고려 유신들과 함께 만수산 서두문동으로 도피했다. 이로써, 염치중과 염이 부자는 성씨문중에서 자랑스런 조상으로 받드는 "두문동 72현"이 되셨다.
국파 염국보의 후손들은 400여년이 지난 후 정조대왕께서 어떤 염씨를 만나보고 '당신이 바로 두문동 후손이로구나'라고 말씀하셨듯이 고려에 충성하던 선조의 후예들이라고 하겠다.

두문동 사람들은 역성혁명세력으로부터 새 조정에 참여해 주도록 회유를 받았는데, 정몽주 및 이색 등도 조정의 회유에 따르지 않자 이들을 몽땅 불질러 태워 죽이려고도 했다. 이 때는 오직 멀리 강원도 치악산으로 들어가 버린 원천석 및 정선으로 도피한 7명만 살아 남았다(문헌록, 1986).
한자 : (廉致中),(廉 怡),(萬壽山),(姓氏門中),(元天錫),(居七賢)

  개성 남산밑 거주와 산중도피생활 : 염치중과 염 이 부자를 포함한 두문동 도피생활을 시작한지 5개월 후에 우왕이 1388년 6월에 폐위되었다. 1388년 12월 여러 가문을 몰살시킨 최영이 그의 부하였던 이성계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졸지에 저 세상으로 갔다. 염치중은 최영의 별세 후 다시 개성 남산밑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염치중은 1392년 조선 개국후 동산나무에 관(冠)을 걸어놓고 또 산중생활로 도피했고,
인간은 백이 숙제처럼 죽을 뿐이다라는 시를 남겼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과 주고 받던 염치중의 시구들이 있다(社稷 瑄源譜).

두문동 70여명에게 조선초기 조정에 참여케 하는 회유과정에서 고려충절도 옳지만 인재들 모두가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으로, 가장 젊던 황 희가 조정에 홀로 나아가 태조-세종조에 명재상이 되었다(문헌록, 1986). 한자 : (山中), (冶隱 吉再), (詩句), (黃 喜, 1363-1452)

이성계와 송은공 염치중 : 이성계는 염치중의 어짐을 잘 알고 사람을 보내서 염치중에게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제수했지만, 이를 극력 사양하였다. 이로 인해서, 태조는 염치중의 그러한 절개를 가상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 대신 그의 친동생 염치용`이 예조참판 및 공조판서로 임명되었다(대동보 및 문헌록, 1986).

후손들의 도피생활 : 무진참화로 3형제의 후손들이 전국 각처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 염치중, 충청북도 옥천 : 염국보의 1남 염치중은 선비로서 불세출의 인물이셨다. 그의 후손들은 치중의 묘를 충청도 옥천에 모셨고, 그곳에서 살았다.(염태호, 2000)

2) 염치용 : 염국보의 2남 염치용은 1388년(우왕 14) 무진참화로 졸지에 부친(염국보)을 잃은 후 광주군 염곡동에서 24년간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곳이 오늘날에는 서울시 서초구로 편입된 염곡동이다.(염태호, 2000)

3) 염치함 : 경기 여주군 금사면 용담리: 염치중과 사촌형제, 동정공 염흥방의 아들, 염치함여주군 금사면 용담리에서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고, 동네이름을 본관으로 삼아 후손들이 용담염씨로 바꾸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용담염씨라는 분들은 동정공의 후손이다(염태호,2000)

4) 염치성 : 함경북도 북청 : 염치중과 사촌형제, 청강공 염정수의 아들인 염치성은 함경도 북청(北靑)에서 불운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염태호, 2000).
한자 : (廉致中), (沃川), (廉致庸), (廣州郡 廉谷洞), (廉致諴), (驪州), (龍潭廉氏), (廉致誠)

 3세 염치용(廉致庸)

염치용 공조참의 및 송사  : 조선의 태종(이방원)은 염흥방이 무진참화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국보의 1남 염치중에게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여 대신 동생 염치용을 불렀다.  公의 휘는 '치용'이고, 초위는 値和인데, 국파공의 둘째 아들이다.
고려 말엽에 고공좌랑,전의부령을 지냈다. 무진의 화를 만나자 한강가에 은거하면서 명예와 이익은 멀리하고 오로지 책만을 벗삼아 지내셨다.

그러던 중 조선 태종때에 공의 행의를 매우 가상하게 여겨 公에게 공조참의를 제수했고, 명나라에 변무사(辨務使)로 다녀 오게 했다.  이때 길을 떠나려 하자 호정 하륜, 독곡 성석린이 시를 지어 공에게 주었고, 춘정 변계량은 서문을 지어 공을 송별하였는데, 성석린의 시는 아래에 있으나, 하륜의 시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데 혹시 이 시의 원문을 가지신 분은 연락 부탁합니다.(염명선, 2000) 한자 : (國寶), (廉致中), (廉致庸), (工曹參議)

염참의를 전송하는 글(送參議公序)   출처 : 변계량의 춘정집 제5권
  공조참의 염선생(工曹參議 廉先生, 염치용/廉致庸, 염국보의 둘째 아들)이 중국(명)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나(변계량/卞季良, 1369-1430)에게 말하기를, “옛날 내(염치용)가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로서 백 명의 입학생(入學生)에게 시험을 보였을 때, 그대가 15세의 어린 나이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 뒤 3년이 지나 을축년(1385, 우왕11)에 이르러 나의 선친(先親, 염국보/廉國寶)께서 과거(科擧)를 주관하였을 때 그대가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그 때부터 그대가 우리 부자(父子)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그런데 우리 가문이 몰락한 뒤로부터 옛날에 사귀었던 사람들이 모두 태도를 바꾸었으나, 그대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므로 내 또다시 그대를 사랑했던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었다. 이번 나의 사신(使臣) 길에 호정 선생(浩亭先生, 하륜/河崙, 1347-1416)과 독곡 선생 성석린(獨谷先生 成石璘, 1338-1423)이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대는 서(序)를 지어 주지 않겠나 ?
  나의 6대조 염희헌은 여덟 번이나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중서우승행성사에 임명되어 승상 백안과 함께 남송을 평정하였다. 그의 손자 염승익(廉承益)은 본국에서 도첨의중찬(都簽議中贊)의 벼슬을 하였고, 중찬의 손자 염제신(廉悌臣)은 나의 할아버지로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을 하였는데, 모두 중국을 드나들면서 국위(國威)를 선양하였다. 이는 할아버지와 손자 3대가 서로 잇달아 사신으로 간 것인데, 또 내가 사신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다행스럽게 여기기는 하나 선조들처럼 임무를 수행해내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그대가 한 마디 말을 해 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옛날 무진년(주-1) 겨울에 선생(염치용)이 나(변계량)의 집을 방문하여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내가 금년의 난을 피한 것은 마치 꿈 속에서 깨어난 것과 같다. 지금 내가 살아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그대뿐이다.”고 하였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내가 항상 선생께서 불우(不遇)한 것을 한탄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선생께서 전하의 인정을 받아 이미 특별한 자리에 임명되었고 또 사명(使命)을 띠고 중국에 가게 되었으니, 비록 공께서 명하지 않았더라도 축하를 할 터에 더구나 나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 서를 써 달라고 부탁하는데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선생은 고려 때 혁혁한 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부귀를 벗어나 소박한 선비의 생활을 하여 마치 어려서부터 익힌 것처럼 하였으니, 타고난 천성이 그러하였다.

  무진년(1388, 우왕14) 이후로 한강 가(현재 서울 서초구 염곡동)에 집을 지어 놓고 밭을 갈고 고기를 낚으면서 명예와 이끗을 멀리한 채 방에 도서(圖書)를 비치해 놓고 담담하게 24년을 살았다. 그러나 출처(出處)의 도리가 변하거나 영욕(榮辱)에 지조가 바뀐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존경하여 마지않았다. 비록 말하고 싶어도 대단하다고만 일컬을 뿐이니, 이번 사신길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억지로 쓸데없는 말을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일찍이 《맹자(孟子)》를 읽을 때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 임무를 주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마음과 신체를 괴롭히는데, 이는 그 사람의 인내심을 길러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말에 이르러서는 그 대목을 반복해서 읽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공을 위해 이 말을 드리고자 한다. 대체로 무진년의 화는 참혹하였다.

  선생께서 황야(荒野)로 물러났을 적에 극한 어려움을 겪었으니, 정말 마음과 신체를 괴롭힌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기(志氣)가 바르고 일정한데다가 정성이 순수하고 분수가 정해졌으므로 처해진 환경대로 살면서 흔연(欣然)히 자득(自得)하여 외부의 것을 원치 않았으니, 정말 부족한 점을 보충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전하께서 공의 훌륭함을 가상히 여겨 육조(六曹)의 높은 자리에다 앉히고, 얼마 안 되어 사명을 띠고 중국에 가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하늘이 공에게 큰 임무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인가 싶다.
  아, 무진년의 화를 모면한 것은 하늘의 뜻이었지 지혜의 소산이 아니었고, 오늘날 공에게 벼슬을 준 것은 주상의 마음이지 천거로 된 것이 아니다. 선생께서 한 발자국을 뗄 적마다 하늘과 전하께서 공에게 후하게 한 바를 잊지 않는다면, 이제부터 임무와 책임이 갈수록 더 중대해져 중책을 맡았던 조상들을 빛낼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틀림없이 그 아름다운 명성과 위대한 공로가 중국에 전파되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니, 선생께서는 기억하시기 바란다.

  이번 사신길에 지척의 천자(天子) 앞에서 우리 전하의 중국을 섬기는 정성을 아뢰어 우리나라로 하여금 동쪽으로 뻗치는 교화를 더욱더 입도록 하는 것은 선생께서 넉넉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 높고 깊은 산하(山河), 장중한 성곽과 궁실, 수많은 군대와 주거(舟車), 완비된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을 이목(耳目)으로 접할 때 성정(性情)을 감동시켜 기상을 증가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선생께서 돌아왔을 때에 관광집(觀光集)을 읽어 보고 심도 있게 논하기로 하고, 이에 서를 쓴다.
  [주-1] 무진년 : 원문에는 무술년으로 되어 있는데, 무술년은 1418년이므로, 염치용이 사신으로 간 1411년과 맞지 않으며, 또 아래의 무진년 이후로 24년간 은거하였다는 등의 기록에서 무진년의 오자로 생각된다.

廉明善견해 - 참의공의 6대조가 廉希憲으로 되어 있는데, '86년 족보에서는 여러 고증을 거쳐 뺏음.
 이 문제에 대하여는 지속적으로 고증과 논의가 있어야 할 문제라 보임. 염희헌이 元나라 사람이고, 원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라 그리 하였음. 또 한가지 1927년 길림성 발행 족보에서는 염희헌을 1세조로 기록하였음.

  다음은 독곡 성석린님의 시를 소개합니다.(이 시는 초계변씨 후손 변수남님이 2005. 2. 3 제공하신 자료임.)

獨谷先生集卷 上   독곡선생 [성석린]
次人韻。送廉參議赴京   다른사람의 운에 차하여 서울에 부임한 염참의를 보내면서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호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侍中曾制平安道             염제신공이 일찍이 평안도를 제어할 때에는
左尹曾叨幕下賓             혁혁한 벼슬에 있었던 관리들이 외람되게도 막하에 몰려들었네
從此朱門多足跡
            이 벌열한 가문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아득하건만
至今白首荷情親             지금은 정분이 썩 도타움도 번거롭게 나이만 먹었구나
孤孫復振箕裘業
            외로운 손자가  벌열한 가업을 다시 떨쳐 일으키려니
盛代能爲翰墨臣             성대함은 능히 나라의 명신이 되면
專對歸來恩更重             오로지 대하여 돌아옴에 은혜는 다시 커질것이니
淸秋一鶚離風塵             맑은 가을 하늘 위에 한 마리 물수리는 더러운 세상과 이별하리

        侍中參議祖悌臣       참의공은 시중 염제신이 조부시다
          
시중 염제신은 파주염씨의 중시조님을 일컬음.
          
벌열 :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사람이나 그런 집안에게 붙여 일컫는 말임.

그러나 염치용 역시 아래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에서 관운의 시작은 괜찮았지만 결말은 불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염태호, 2000)

조선왕조실록 : 태종 022 11/09/20
공조참의 염치용을 보내어 경사에 갔으니 지차를 바치기 위함이었다. 풍해, 충청, 강원, 경상도 도관찰사겸목의 임직을 혁파하고, 염치용으로  판황주목사로 삼았다(
http://silok.unitel.co.kr:8000/sscdb/cgi-bin/.../silok1&rsid)

염치용은 해주목사때 황해도 감사와의 의견대립이 조정에까지 알려져서 사헌부 형조대간들이 그를 논척했다. 그러나 태종과 세종의 신임과 보호를 받아 무사했다(문헌록, 1986).
한자 :  (京師), (紙箚), (都觀察使兼牧), (判黃州牧使), (海州牧使)

조선왕조실록 : 태종 026 13/08/17
염치용에게 장 1백대를 속(贖)받고 안동에 유배시켰다. 처음에 황주유학교수관 나득경기생을 거느리고 성전 근처에 거하였는데, 목사 염치용이 이를 힐책하니까, 나득경이 몰래 염치용의 죄 10여가지를 써서 감사에게 고했다.

감사가 안핵하여 다스리니, 염치용이 마음대로 직임을 이탈하여 남몰래 서울로 들어와 상왕전의 환관과 궁첩에게 감사를 참소하고, 또 그 처를 시켜 감사의 죄 5,6가지를 갖추어 사헌부에 정소하게 했다. 감사의 안핵 치죄한 보고가 잇달으니까, 임금이 대언에게 일렀다. "염치용의 가비가 상왕전에 들어가 시첩이 되었는데, 염치용이 등용된 것도 상왕의 청함 때문이었다".

사헌부에 상언하기를 "염치용이 국고의 남은 쌀과 콩 3백석을 사용하고, --마음대로 임지를 떠나 병든 아내를 만났습니다".
순금사에서 "염치용의 죄는 참형에 해당하였으나 한 등을 감하여 먼 지방에 가 있게 했다". 이에 하륜이 예궐하여 청하기를, "염치용은 소신의 외손(外孫)의 양부(養父)입니다. 그 남은 곡식을 관중의 용도로 하고 자기에게 들이지 않으니, 청컨대, 용서하소서."라고 하여 장 1백대만 받도록 했다.
한자 :  (安東), (黃州), (儒學敎授官), (羅得卿), (妓生), (聖殿), (上王殿), (呈訴), (家婢), (代言), (侍妾), (河崙), (官中),

태종조 026 13/09/06 : 사간원에서 염치용, 방여권, 남궁계를 논죄하다
태종조 029 15/04/09 : 난언을 발설한 문제로 민무회, 윤사영, 염치용, 권집지 등을 의금부에 가두다. 이처럼, 염치용이 송사로 인해서 고생한 바 있으셨다.

4세 폐와공 염 이는 고려말에 염흥방(작은 할아버지)과 조선초에 염치용(작은 아버지) 두 분께서 겪은 바 있었던 치욕을 직접 목격하셨다. 이로 인해서, 염 이는 후손들에게 남겨주신 가훈이 '높은 벼슬을 구하여 화란이 미치지 않도록 하라'는 가훈을 남기신 것으로 볼 수 있다.(염태호, 2000)
한자 :  (廉 怡), (禍亂), (辱)
 

4세 염 (廉 怡)

   4세 폐와공  염이는 3세 염치중의 아들, 생졸미상, 아내는 영천황보씨, 슬하에 장남은 순량, 차남은 순공이셨다.  벼슬 : 봉정대부첨지통례문사(官奉正大夫僉知通禮門事)(대동보, 1986).

호가 폐와(閉窩)라 함은 무진참화로 몰락된 가문의 후예로서 문을 닫아걸고 세상을 피해서 산다는 두문피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자: 閉窩公 廉怡, 廉致中, 永川皇甫氏, 奉正大夫=정4품/부이사관, 順良, 順恭, 杜門避世

이 색의 문하생, 과거급제, 봉정대부 : 염 이는 목은 이색에게 수업을 받았고, 학문에 독실하여 성리학을 연구했다. 1386년(우왕 12년)에 과거에 급제, 봉정대부 첨지통례문사에 올랐다. 길재 등의 현인들과 함께 왕실을 다시 일으키자고 맹세한 바 있었다.(대동보, 1986).
한자 : 穆隱 李穡, 性理學, 僉知通禮門事, 吉再

무진참화 후유증 : 우리 문중은 무진참화에 뒤를 이은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개국 이후 염씨 3계파 각각의 후손들은 함경도(북청), 경기도(여주), 전라도(나주, 보성), 충청도(옥천, 제천, 보령), 경상도(상주) 등으로 흩어져서 살았다.
이로 인해 조선 정조대왕으로부터 어떤 염씨가 "두문동 후손"이라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문헌록, 1986).

산중도피생활 : 염 이(廉怡)께서는 무진참화후 가문 전체가 위기에 처하자 벼슬을 버리고 숨어, 채미가와 황국시를 지으며, 산중에서 두분불출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려충의 열전, 1994. 고려충의회 발간, 송은공편)

차라리 죽어서 왕씨(王氏)의 귀신이 되리라,   살아서 무엇하리 죽음이 오히려 빛나도다 .
위와 같은 시의 내용처럼 염 이는 실의에 빠져서 살았다(대동보, 1986).

염씨 가훈 : 염 이는 자손들에게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경서와 학문을 업으로 삼아 문호를 보존하고, 과거를 일삼지 말며, 높은 벼슬을 구하여 화란(禍亂)과 욕(辱)이 미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것이 앞에 실려 있는 "염씨가훈"의 골격이 되었다. 그리고 유언처럼 염 이는 끝끝내 절개를 지키셨다고 한다. 이 가훈은 대종회 종보에 종훈으로 삼아 싣고 있음.(대동보, 1986).

5세 : 염순공의 형님이신 5세 염순량은 경상북도 상주입향조가 되신 분이고, 관직은 계공랑 군자직감이었다(대동보, 1986).  한자 : (廉順良), (尙州立鄕祖), (啓功郞 軍資直監)

6세 : 염순량의 장남인 6세 염상항은 단천부사, 2남 염귀항은 김해부사, 3남 염익항은 사정, 4남 염유항은 정언, 5남 염종항은 상호군, 이들 모두의 묘는 상주에 있다고 한다(대동보,1986). 이는 국파공 후손들 중에 일부가 경상북도 상주 땅에 뿌리를 내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염태호, 2000)
한자 : (端川府使), (金海府使), (司正), (正言), (上護軍)

 5세 염순공(廉順恭)

미곡공 염순공4세 염이의 차남, 호는 미곡, 생졸미상, 아내는 숙인 광산김씨, 생존기간은 1400년대 전반기.
   은일로 널리 알려졌다. 전남 나주 입향조로 나주 충경서원에 설단을 세우고 향사 지냄.
   묘소는 경기 풍덕군 남면 산귀리 사패지에 있다.
   장남은 염재, 차남은 염기다. 손자는 7세 염신손이다.
한자 : (微谷公 廉順恭), (薇谷), (叔人 光山金氏), (隱逸=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사람),
          (廉縡=성균생원, 송화현감, 묘소/나주), (廉紀), (廉愼孫=군자감부정, 묘소/ 전남 보성)

염순공과 세종대왕 :  염순공은 무진참화 이후에도 학문에 힘썼고, 부친 염이의 유언 "명예와 지위를 구하지 말라"는 뜻에 따라  벼슬길에 나서지 않던 중 세종께서 순공의 고결한 절개를 전해 듣고, 염순공에게 중군사직사헌부지평을 두 번씩이나 제수했지만, 모두 사양했다.(대동보 문헌록, 1986).
한자
: (中軍司直=정5품), (司憲府持平=정5품),

나주입향조 염순공 :  5세 염순공은 가족을 거느리고 1400년대(세종때) 송도(개성)와 한양에서 먼 나주 금성산 아래로 도피해 살면서 나주 입향조가 되었으며, 자손들에게 성리학을 강론, 학문과 예법을 빛냈으며, 처음엔 나주 서문밖의 향교터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향교 위치가 외지고 좁으며 건물이 낡아서 모습이 매우 초라해서, 공이 이를 참지 못해 의견을 내서 자기의 집터에 향교를 새우고 바로 행랑채를 명륜당으로 만들어, 당시 사람들이 공을 고려에 문교를 진흥시킨 안향고사에 비유하였다. 제사 모시는 곳은 나주 금강사다(대동보, 1986).
한자
: (羅州 立鄕祖, 文敎, 安珦, 古事).

미곡공의 처가 : 미곡공의 장인은 광산김씨 17세 김덕용(德龍 : 광산김씨 문숙공후 시중공파 밀직사사공파)으로 광산김씨 나주 입향조이며, 중직대부 판사복시사 병마도원수 대사헌을 지낸 분이고, 미곡공의 처남은 김신좌(信佐)로 자헌대부 행공조판서를 지냈다. 처증조부는 김유(流)로 감찰어사 문하시중을 지낸 분으로 '시중공파'의 파조이시며, 처조부는 김중간(仲幹)으로 동지밀직사사 좌찬성 상호군으로 '광산김씨 시중공파 밀직사사파'의 파조다.(廉明善)

장남 송화공 염재 : 송화공 염재는 일찍이 외가(광산김씨)를 따라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공은 고려시대에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부친(염순공)처럼 시골에서 궁벽하게 살면서 출세는 바라지 않고 학문에만 독실하였으므로 선비들이 공을 칭송했다. 세종때에 두문동 은거 후손들을 찾아내 등용했을 때, 공의 행적을 듣고는 곧 바로 조산대부송화현감으로 임명하자 공은 부모의 공양을 위해 취임했다. 공은 청백하게 정사를 베풀어서 읍인(邑人)들이 비석을 세워 공의 덕을 기념하여 잊지 않고 있다. 한자 : (廉縡), (明倫堂),   (朝散大夫), (松禾縣監)

 ※. 우리 조상께서 나주로 내려오게 된 동기는 1388년의 무진참화와 고려의 멸망 그리고 미곡공의 장인인 광산김씨 나주 입향조 대사헌 김덕용이 나주로 이거(移居)하게 되고, 그래서 미곡공께서 처가를 따라 나주로 내려와 살게된 것으로 추상된다. 미곡공께서 처음 사신곳은 나주 금성산 아래 서문밖이었고, 다음은 회진(會津=영산강 하구)으로 옮겼다가  그 다음은 신촌(新村=榮山)이 었다.  (2005년 3월 염명선).

 

6세 염(廉紀)

  부정공 염기(1426-1496)는 5세 염순공의 2남, 금성 명문유가 출생(1426년: 세종때),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자라면서 학문을 좋아해 나라와 백성의 다스림에 밝았으며, 40세에 성리학에 정진하여 문하생 중에 문사들이 많았다.
관직은 성종때 어모장군, 행훈련원부정, 아내는 숙인 창녕조씨, 장남은 효증, 차남은 효건, 염기의 사망은 연산군때, 묘는 나주 내영산에 있다(부정공묘표 ; 대동보, 1986).
한자 : (副正公 廉紀),(羅州),(理世之道),(禦侮將軍/오위도총부=정3품),(行訓練院副正), (叔人 昌寧曺氏),
          (孝曾=進士 1447-99), (孝騫), (1496년 : 연산군, 1494-1506),  (副正公墓表) 

훈련원과 오위도총부 : 훈련원은 군졸의 능력을 시험하고 무예를 연습하던 곳으로 병서와 진영 담당기관. 삼군부는 1464년(세조)에 오위도총부로 개칭, 중앙군 오위를 지휘토록 했다.

국방체제는 5위의 중앙군보다 지방군이 더 중요했다. 도(道)에 병영수영이 하나씩 있어서 육해군을 통할했고, 밑에 여러 진(鎭)이 있었다(이기백,1984).
즉, 염기염효건이 오위도총부 어모장군이셨다.(염태호, 2000).
한자 : (五衛都總府), (兵營), (水營), (廉 紀), (廉孝騫), (禦侮將軍, 정3품/1급 관리관)

7세 염효건(廉孝騫)

  중추공 염효건(1450-1505)은 염기의 2남, 출생은 문종(1450-52)때였고, 사망은 연산군(1494-1506)때였으며, 관직보다 오직 학문에만 충실하여 나주 유생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던 중, 어모장군, 행상호군중추부사.  묘는 나주, 아내는 숙부인금성오씨, 1남은 공거, 2남은 백거, 3남은 경원, 4남은 성원이셨다.(대동보, 1986).

효건선조의 4남이 나주에서부터 각각 시흥과 보령, 제천으로 흩어지면서 전국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염태호, 2000).
한자 : (中樞公 廉孝騫), (禦侮將軍/정3품), (行上護軍中樞府事=오위도총부 최고직),(府事公墓表: 문헌록), (叔夫人錦城吳氏, 1452-1510), (公擧=묘 시흥), (白擧=묘 시흥), (慶遠=묘 충남 보령), (聲遠=묘 충북 제천)

사림세력 : 9대 성종(1469-94)때 훈구세력의 지배하에 지방사림들이 대거 중앙정치무대에 나와 진통을 겪었다. 사림은 지방의 독서인군으로 중앙정계보다 향촌에서 향약소나 향청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영남사림은 고려왕실에 절의를 지켜 조선에서 벼슬을 거부한 길재 학통으로 크게 세력을 떨친 것은 길재의 손자벌 제자 김종직에 이르러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과 같은 많은 제자의 배출부터였다.

이들은 대체로 경학에 능한 도학자여서 관학자와 학문경향이 달랐고, 성종이 훈구세력의 일방적 비대를 막고자 등용하여 중앙으로 진출해서 주로 삼사 계통의 언론문필을 담당하여 훈구세력과 사림세력간 대립투쟁이 조성되었다. 그 첫째가 10대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 두번째가 1504년 갑자사화였던 것이다(이기백, 1984).
한자 : (勳舊勢力), (士林), (讀書人群), (吉再), (金宗直), (金宏弼), (鄭汝昌), (金馹孫)
          (道學者), (官學者), (三司), (言論文筆), (戊午史禍), (甲子史禍)

 

 1.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우리 염문 선조의 활약

  정묘호란
인조 5년(1627년)에 후금의 태종이 명(明)을 칠 야심으로 먼저 3만 병력으로 조선에 침략한 것이 정묘호란이다. 인조는 조정 신하들과 강화도로 피난가서 전세를 돌이키려 했지만 역부족이라 후금과 형제지국이란 굴욕외교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조선왕조실록: 박영규, 1996). 한자 : (後金), (兄弟之國) 

   .병자호란
인조가 굴욕외교를 맞이한 후 청나라  태종은 형제지국이 아닌 군신지국으로 고칠 것과 군량, 군비 및 공물을 늘려줄 것을 강요하던 중 인조 14년(1636)에 국명을 청(淸)으로 바꾸고, 태종은 황제가 되서 조선에게 받들라고 요구해 왔다(조선왕조실록: 박영규, 1996).

그러나 김상헌척화론이 최명길의 주화론보다 우세해서 청 태종의 무리한 제의를 거절, 전쟁준비에 들어 갔다. 1636년12월 2일 청태종은 10만 병력으로 심양을 떠나 불과 14일후 남한산성에 처들어왔다.  그간 봉림, 인평 두 왕자와 비빈, 종실사람들은 강화로 피난했지만 인조와 소현세자 및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도피했다. 인조는 산성에 갇혀서 백성과 함께 피마르는 45일간 강추위와 굶주림으로 1637년 1월 30일 송파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에 소현, 봉림 두 왕자는 청에 인질로, 척화파 주모자 삼학사도 잡혀 갔다. 이 때 염득수는 남한산성을 지키면서 송파나루에서 굴복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항복에 반대했어도 인조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박영규, 1996).
한자 : (君臣之國),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斥和論),  (主和論), (瀋陽), (南漢山城; 경기도 성남시), (三學士 : 윤집, 홍익한, 오달제)

  9世 첨정공 염산국 (僉正公 廉山國)
   인종 어가 호종, 훈련원 첨정, 원종공신 : 염산국은 병자호란때에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힘껏 싸워 성을 지킨 공로로 "산국(山國)"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훈련원 첨정에 제수되었으며,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문헌록, 1986).

  11世 만산공 염우혁 (晩山公 廉友赫)
   문과 급제 : 만산공 염우혁은 중시조 염제신의 세아들(국보, 흥방, 정수)이 과거 합격란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었듯이, 조선왕조의 염씨문중에서 유일하게 1627년(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한 분이시다.
公의 휘는 우혁이고, 자는 군익이며, 호는 만산인데, 증병조참판 휘 호붕의 아들이요 청강공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일찍이 단천의 두언태촌에서 살았는데, 교룡이 부인 김씨를 꽁꽁 감아도는 꿈을 꾸고나서 얼마후에 태기가 있어 공을 낳았다.

공은 기상이 매우 뛰어나고 재덕이 겸비하였다. 어릴때에 선수대에서 글을 읽었는데, 관찰사가 마침 본읍을 순찰하다가 바람결에 은은히 들려오는 낭랑한 공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소리나는 쪽을 따라 찾아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찾아서 공의 준수한 모습을 보고는 두 번 세 번 칭찬하면서 '이 아이는 비상하니 뒤에 틀림없이 크게 될 사람이다'하였다.
그후 단천에서 안변 학포로 옮겼다.

  정언, 인조 어가 호종, 독전어사 : 공은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으로 종묘 제향에 종사하면서, 향로가 매우 뜨거워 향로를 받쳐들고 있는 두 손이 지글지글 타는데도 더욱 더 조심스럽게 접례하였다. 또 축관이 되어 대가(임금님의 수레)를 따라 북단에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밤은 매우 깜깜한데다 바람이 일어서 촛불이 꺼지곤 하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축을 읽어내려가니, 그 축을 다 읽기도 전에 비가 내렸다.  그러자, 임금이 크게 기뻐하면서 환궁하였다. 그 다음날 상의 전교에 의해 입시하니 '우혁'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초명은 '우선'이었다)

  평안도에서 선비들의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여러 유생가운데 어떤이가 '시관이 시를 볼줄 모른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공이 試場을 파하고 나서 수레를 멈추고 여러 유생들을 불러 놓고 각기 그들 시권의 첫귀를 물은 다음, 연해서 그 시 전체를 마치 자기가 지은 것처럼 줄줄 외면서 '아무 구절은 이러하고, 아무 운은 저러하니, 제생들은 학업이 정밀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요. 유사가 밝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그러자 여러 유생들이 모두 감복하여 말하기를 선생은 참으로 기이한 분이다고 하였다.

  병자호란때에 인조의 어가를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충성을 다하여 성을 지키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겨 독전어사에 임명하였다. 그후 문천, 희천, 연안, 장연, 북청, 철원 등 아홉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많은 훌륭한 치적을 남기셨다.

  사헌부 장령 : 공은 그후 조정에 들어가서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그후 품계가 가선대부에 오르고 벼슬이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뒤에 학포에서 다시 철운부의 북쪽 유정동으로 아사하여 살았으므로, 자손이 거기에 그대로 살고 있다. 신축년 7월 9일 관아에서 별세하자 유정동 응암의 서쪽 비탈에 반장하였다. 여기에 대한 기록은 '단천지, 안변지, 병자일기' 등에 있음. 함경남도 단천의 송산사에 충경공 염제신, 조암공 염덕우와 함께 제향되셨다(문헌록, 1986).
한자 : (文科), (督戰御史), (掌令), (松山祠), (肇巖公 廉德隅)

  11세 첨정공(僉正公) 염성립 행적
  
첨정공(誠立)의 자는 여실이며, 양산공의 셋째 아들이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있고, 절개가 또한 굳세었다. 병자호란때에 오현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뜻을 같이하는 향인들과 함께 의병 3백명을 모집하여 여산에 모아놓고, 좌우에 이르기를 '임금이 파천을 하였으니 이 어찌 신자로서 두려워 할 때이겠는가'하였다.  이어서 청주로 전진하다가 화의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산양의 죽림에 은거하였다. 여기에 대한 사실은 창의록에 실려 있다.

   12세 득수 의병(廉得水: 1564-1645)
   판사공 염득수는 염흥세의 아들, 통사랑선공감역, 병자호란때 적으로부터 어버이를 보호하다가 대신 순국해서 추증관직이 통정대부판사복시사(정3품),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재간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1636년 병자호란때 의리를 내세워 호인을 꾸짖으며 송파나루에서 굴복하지 않는 절의로써 이름을 떨쳤다.

  아내 숙부인 연안차씨, 슬하에 4형제 중 1남은 정환, 2남은 정행, 3남은 정구, 4남은 정춘. 염득수와 연안 차씨의 묘는 시흥군 현내면 박달리 수리동 건좌건위와 쌍분이다(대동보, 1986). 염득수의 생존기간은 13대 명종(1545-67)부터 16대 인조(1623-49)때까지다.한자 : (判事公 廉得水), (通仕郞繕工監役=정8품/7급), (湖人), (松波津=잠실 석촌호수 근처), (節義), (叔夫人 延安車氏, 1565-1650), (正還), (正行), (正龜), (正春)

 2. 그외 선조님들 소개

판서공(判書公) 염증 행적
  
판서공(憎)께서는 참의공 휘 치용의 아드님으로, 學行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세종때에 벼슬이 예조 참판.공조판서에 이르신 분이다.

 군수공(郡守公) 염상항(6世) 행적
  
군수공(尙恒)은, 휘 순량의 아들이요, 국파공의 현손이다.  商山에 은거하여 문달을 구하지 않고 성리학에 독실하였다.  매형인 李충간公숭원과 같이 도의를 연마하였으며 네 동생이 있으니 부사 휘 귀항, 사정 휘 익항, 정언 휘 유항, 상호군 휘 종항이다. 모두가 학행이 있어 우애가 더욱 독실하였으나 공의 행의가 더욱 현저하였으며, 벼슬은 서산군수를 지냈다.

 진사공(進士公) 염수(6世) 행적
  
진사공(壽)는 주부벼슬을 하였으며 휘 응동의 아들이요, 동정공의 현손이다.  일찍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행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세조때인 병자년(1456년)에 운수의 양지쪽에 은거하면서 경학으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세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의공(文義公) 염순(6세) 행적
   문의공(淳)은, 좌랑공 휘 상지의 아들이요, 동정공의 현손이다.  세종때 고려의 명신들의 후손을 찾아 등용하면서 공의 행의를 듣고는 조산대부에 문의현령으로 발탁 임명하였는데, 공은 정사를 청백하게 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불망비를 세워 기념하였다.  익대의 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공은 뒤에 장인인 호조판서 강공미시를 따라 재령에서 살았다.

 참의공(參義公) 염호붕(10세) 행적
  
참의공(好鵬)은, 휘 순청의 아들이다. 지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어버이가 돌아가셔서는 3년동안 여묘살이를 하였으므로 고을에서 효자라고 일컬었다. 인조때 공에게 병조참의를 추증하였다.

  公의 첫취는 숙부인 광양김씨이고, 재취는 숙부인 강릉김씨에서 아들 5형제를 두었다. 큰아들은 통덕랑 우승이고, 둘째는 우혁으로 조선시대 우리 염문중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하셨고 참판에 이르렀으며, 그 다음이 통덕랑 우웅이고, 그 다음이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판관을 지낸 우일이시다.

 

금파공(錦坡公) 염공필(11세) 행적
  
금파공(公弼)의 자는 사흠인데, 송화공(재)의 5대손이다. 공은 막 나서부터 매우 영민하고 총명하여 동작이 비상하였다.  자라나서는 또 의기심이 많고 재간과 도량이 있었다.   공은 금산의 양지쪽 영호가에 은거하면서 힘써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며, 명예와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호를 금파 또는 영호처사(영호강 가운데 섬이 있기 때문이다)라고도 하였다.  행의로 천거되어 감역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 2년(갑자 1624년) 이괄의 난때 반적이 도성에 침범했다는 말을 듣고는 아우 공작과 함께 분발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리니, 의병에 참여하겠다는 동지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자 아우로 하여금 먼저 가동들을 인솔하여 곧장 군성으로 가게하고, 공은 군대와 군량을 모집한 다음 곧 그 뒤를 이어 따라가서 공주에 이르렀는데, 공주에서 반적 이괄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서 춤을 추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실은 창의록 및 금성지에 기재되어 있다.

 승지공(丞旨公) 염공작(11세) 행적
  
승지공(公綽)의 자는 사금인데, 금파공의 아우이다. 용력이 뛰어난데다 겸하여 재락도 있었다. 1621년(신유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정충신에게 가서 이괄을 베 죽일 것을 꾀하자 정공이 본래부터 공의 뛰어난 용맹을 들어왔던 터에 공을 한번 보고는 매우 장하게 여겨 대번에 선봉으로 삼으니 공이 있는 힘을 다해 분격하여 마침내 역적 이괄을 베 죽였다.
  조선의 조정에서 특별히 공에게 안장을 지운 말과 옷의 겉감과 안감 및 옥대를 하사하고, 원종일등에 녹훈하여 공을 포창하고 총애하였다.
이어서 공을 좋은 관직에 등용할 일이 한창 의논할 때 마침 남양 순천진에서 교룡(이무기)이 변괴를 일으켜 사람을 잡아먹는 등 그곳 진관까지 연달아 해치므로, 그곳 주민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 가서 해안일대가 거의 비어 버리는 지경이었다. 그러자 조정의 의논이 모두 '염모의 지용이 아니고서는 그 교룡의 우환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으로 상께 아뢰니, 상이 특별히 공을 그곳 진관으로 보내었다.   공은 명을 받고 순천진에 도착하여 특별히 엄수하는 일 없이, 다만 좌우 사람들로 하여금 동로에다 탄불을 피워서 문밖과 방안에 죽 늘어놓게 하였다.

  그리고 공은 왼손에는 철편을 쥐고 오른손에는 장검을 쥐고서 촛불을 밝혀 놓고 앉아서 그 변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천둥같은 바람이 일면서 사방 문이 저절로 활짝 열리더니 갑자기 마치 용의 머리처럼 생긴 한 괴물이 창문으로 목을 쭉 빼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공은 몸을 공중으로 날려 그 화롯불을 가지고 그 이무기의 머리를 내리치니, 이무기란 본디 음물이기 때문에 뜨거운 불에 깜짝 놀라 빨리 들어오지 못하고는 머리를 움츠리며 되돌아 가려고 하므로, 공이 몸을 날려 괴물의 목을 단칼에 내리쳤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에 보니, 이는 바로 늙은 이무기로서 세 개의 문에 가로로 걸쳐 죽어있었다. 그러자 이민들이 서로 모여 순천진의 걱정거리가 없어지게 된 것을 축하하였다.  공은 아 사실을 조정에 보고 하기 위해 즉시 말을 달려 상경하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공의 비보를 듣고는 조야가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여겼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공에게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이 사살은 훈록 및 여지에 실려있다.

 참봉공(參奉公) 염각(11세) 행적
  
참봉공(珏)은 휘 계평의 아들이요, 동정공의 후손이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여, 착한 일을 보면 미처 실천하지 못할 것처럼 바쁘게 서두르고, 악한 일을 보면 자기 몸까지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매양 도의를 지켜서 선비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세속에 따라 처신하지 않으니, 시골 구석의 간사한 무리들은 공을 꺼리고 미워하는 자가 많이 있었다.   선조 때에 천거를 받아 전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공의 아들 희맹은 일찍 진사가 되었고,  또 학문을 좋아하여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호군공(護軍公) 염시준(11세) 행적
  
호군공(時俊)인데, 병자호란때의 공신인 첨정공(산국)의 손자이다. 戊申년의 반란 때 의병을 일으켜 종군, 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그 공으로 절충부호군에 승계되고 원종공신에 녹훈 되었다.

 미촌공(美村公) 염진거(12세) 행적
  
미촌공(振擧)의 자는 경명이며, 미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美川선생이라고 하므로, 이를 호로 삼았다. 공은 바로 정랑공(공익)의 아들이요, 송화공(재)의 후손이다.  공은 천성이 강직하고 정신이 매우 영민하였는데,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엄숙하게 앉아 있으면 파리도 앞에 날지 못하고, 제자들도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공은 학문이 깊었고, 가문이 아주 잘 다스려졌으며, 항상 정직으로 몸을 단속하고 효우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기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공을 공경하여 복종하고 온 고을 사람들이 공을 사모하여 본받았다.  그 고을 원님인 이익저가 마침 鄕會로 인하여 공의 위의를 바라보고는 깜짝 놀라 경의를 표하고 그대로 당을 내려와 공을 맞아 당위로 올라가서 서로 두어마디를 강론해 보고는 감탄하여 마지 않으면서, "남주에 이런 큰 인물이 있을 줄은 뜻밖이었습니다."하였다.  그후에 그 원은 또 여러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쪽 지방에 와서 세 가지 장관을 보았는데, 하나는 웅장하고 화려한 금성관이고 또하나는 깊고 넓은 남해이고, 나머지 또 하나는 영민하고 인품이 뛰어난 염선생이었소".라고 하였다.

  공은 항상 유학을 진흥시키려던 일 때문에 간사한 무리들의 모함을 입어 서도로 귀양을 갔다. 공이 귀양살이하던 고을에는 향교가 있었는데도 선비들이 공자에게 제사지내는 예절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공이 제사 의식을 가르쳐주고 또 젯상 진설하는 방법과 집사하는 절차를 도표로 그려서 선비들에게 주어 영원한 규칙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그 예의범절을 일러 염선생의 가례라고 하였다. 그후 선비들의 의논에 의해 신원됨으로써 귀양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후로는 궁벽한 시골에 은거하면서 오로지 경학을 낙으로 삼았으며, 문달을 구하지 않고 그대로 세상을 마쳤다.

 남호공(南湖公) 염진국(12세) 행적
  
남호공(振國)의 자는 광숙이며, 금파공(공필)의 큰아들인데,  큰아버지인 참의공(공헌)께 양자로 갔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자라서는 우암 송시열선생과 종유하여 덕기가 더욱 성취되었다.  인조때에 행의로 천거되어 특별히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어버이가 늙어서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러자 또 청암도찰방을 제수하였는데, 이곳은 공의 집과의 거리가 십리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니, 대체로 공이 집에 그대로 있으면서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후로 조정에서 계속 불렀지만 나가지 않고 경학을 탐구하며 스스로 즐기었다.

  강호에다 정자를 세워놓고 납상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일찍이 사암선생 박순이 여기에 원운을 지었고, 당시의 제현들이 모두 여기에 차운하였으며 또 공은 우암선생과 서로 주고받은 시가 있다. 병자호란때 어가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이 前 부사인 외숙 정여린에게 이르기를 "임금이 굴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약한 군비로 막강한 청의 오랑캐를 대적하는 일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지만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이 하찮은 견마의 충성을 다 바칠 것이요. 맹세코 이 적들과는 이 하늘 아래 함께 살지 않겠습니다"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모두 5백여명을 모은 다음 인근 고을에 격문을 돌려 다른 의병들과 여산에서 합세하여 즉시 청주에 당도하였으나, 화의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통곡을 하면서 돌아와 버렸다. 이 사실은 '창으록 및 금성지'에 실려 있다.

 장한당(藏閑堂) 염호(12세) 행적
  
장한공(廉鎬)이고, 자는 자경인데 참봉공(공일)의 아들이고, 송화공(재)의 후손이다.  금성 남쪽 삼미동에 은거하면서 그 堂에 '장한'이라고 편액을 달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있어 나이 겨우 10여세가 되었을 때 참봉공이 악성 종기를 앓았는데, 의원의 말이 농을 입으로 빨아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그 때 공이 곁에서 그말을 듣고는 즉석에서 아버지에게 자기가 농을 빨아내겠다고 청하니 참봉공은 차마 어린 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없다고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울면서 굳이 청하여 3일동안을 계속 빨았는데, 손으로는 촛불을 잡고서 입으로 환부의 농즙을 빨다가 촛불이 다 타서는 손가락까지 타내려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렇게해서 농을 다 빨아내니 그 종기는 완치되었다. 사림이 모두 공에게 지극한 효성이 있다고 칭찬하고 공의 효성을 모양하였는데, 이 사실은 '읍지'에 실려있다.

공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휘는 약수와 약허이다. 모두 효성 있고 우애가 있어 집안의 명성을 잘 이었다. 또 손자가 5형제인데, 휘는 지백, 지향, 지명, 지중, 지파이다. 이들은 모두 재예가 뛰어나서 문단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당시 '아우되기도 어렵고 형 되기도 어렵다'는 말이 있었고, 또는 '이백이니 왕희지'니 하는 칭찬도 흔히 있었다.

 첨정공(僉正公) 염세적(13세) 행적
  
첨정공(世迪)은, 참봉공(서)의 5대손으로 동정공 후손이다.  무신년의 반란 때 적도들이 합천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우 세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공격하였다.  적들은 공에게 쫓기어 거창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어 생포되었는데 이는 모두 공이 적의 예봉을 꺾어놓은 때문이었다. 이에 공은 훈련원 첨정에 오르고 원종공신에 녹훈 되었다.

 통덕랑공(通德郞公) 염세형(13세) 행적
   통덕랑공(世亨)인데, 첨정공(세적)의 아우이다. 무신년의 반란 때 적도들이 함양을 함락하고 합천을 점거하자, 각 읍이 모두 소란하고 사람마다 겁이 나서 벌벌 떨고만 있었다.  이때 공의 형 세적이 혼자서 텅빈 성을 지키고 있을 뿐 그밖에 별다른 방도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서 우병사에게 이 사실을 고함으로써 대군이 마침내 당도하여 대군과 합세해서 적도들을 무찔렀다. 이 사실은 창의록 및 야사에 실려 있다.

  판소리 명창 염계달
  생몰미상. 조선 후기에 활약했던 판소리 명창. 조선 후기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충주에서 살았다. 모흥갑 송흥록과 동년배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재질이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충청도 음성에 있는 벽절이라는 절로 들어가 10여 년간 판소리를 열심히 수련하고 속세로 나와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헌종 때에는 어전에서 판소리를 하여 동지 벼슬을 제수받았다.  김성옥과 더불어 중고제(中古制) 판소리의 시조로 꼽히고 있는 그는 [장끼타령]과 [흥부가]를 잘하였고 권삼득의 창법을 많이 본받았다.  

  경기도 향토가요조의 판소리를 응용하여 여러 대목의 소리를 짜서 이를 경드름[京調]과 추천목이라고 불렀다. 경드름은 경기민요 [창부타령] [도라지타령]과 같은 민요의 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이고, 추천목은 [한강수타령] [오봉산타령] 같은 민요의 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이다. 그는 춘향가 중에서 십장가 대목을 잘하였는데, 그는 더늠으로 춘향가에서 '남원골한랑' 대목은 경드름으로 되어 있고, 춘향가에서 '네그른 내력'대목과 수궁가에서 '토끼 욕하는'대목은 추천목으로 되어 있다. 그는 판소리에 경드름을 도입한 명창으로 공이 크다(염남섭님 제공)[참고문헌 : 조선창극사, 판소리소사, 판소리 8명창 음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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