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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염씨 자료 고려사 해설

고려사 파주염씨 자료 발췌

'고려사 열전'의 구성과 내용  -  한충희(계명대학교 인문학부)

 

   1. 『고려사』의 편찬
 『고려사(高麗史)』는 기전체(紀傳體)로 쓰여진 137권의 고려 475년간의 정사이다.
1~46권에서는 태조 이하 32왕(우, 창왕 제외)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였고,  47~87권에서는 천문지 등 12분야와 연표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였고,   88~137권에서는 후비·종실·공주, 문·무제신, 반역자 등 고려 일대의 인물 949명의 전기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다.

   고려왕조의 역사정리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전왕조의 역사를 정리하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개창한 조선왕조를 합리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편찬된 고려역사는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이 왕명을 받고 편찬을 시작하여 1396년(태조 4)에 완료된 편년체(編年體)의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이었다. 이 『고려국사』가 1414년(태종 14)까지 열람되다가 정도전 등의 정실이 개입되었음이 지적되면서 공민왕대 이후 부분을 개수(改修)하기로 하고 하륜(河崙)·남재(南在)·이숙번(李叔蕃)·변계량(卞季良) 등이 왕명을 받고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은 1416년(태종 16) 하륜의 사망으로 일단 중단되었다.

그 후 1419년(세종 1)에 세종이 정도전 등이 필삭(筆削)하여 본초(本草, 사초)와 같지 않은 곳이 많음을 지적함에 따라 유관(柳寬)·변계량 등이 왕명을 받아 『고려국사』 중 사초(史草)와 같지 않은 것을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다시 정도전이 참월(僭越)하다 하여 ‘종(宗)·절일(節日)·조(詔)·짐(朕)·사(赦)·태후(太后)·태자(太子) 등을 왕(王)·생일(生日)·교(敎)·여(予)·유(宥)·태비(太妃)·세자(世子)’로 격하하여 서술한 것이 논란되었다.
이어 세종의 직서(直書) 방침에 따라 5년 12월에 유관·윤회(尹淮)가 『고려국사』의 개정에 착수하여 세종 6년에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로 완성되었다.
그러다가 세종 20년에 다시 승지 허후(許)의 발의로 기전체에 의한 고려사 수찬(修撰)이 제기되고 이를 세종이 가납하면서 최초의 기전체 『고려사』가 편찬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개(申槩)·권제(權提)·남수문(南秀文) 등이 왕명을 받고 편찬을 시작하여 세종 24년에 찬진하였다.
이 때의 기전체 『고려사』가 그 후 수사(修史)의 공정성이 문제되어 다시 수찬되고, 수사 총책임자인 김종서(金宗瑞)가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에 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살해됨에 따라 부책임자이던 정인지(鄭麟趾)로 총책임자가 바뀌는 등의 개변을 거쳐 현재에 전해지는 『고려사』의 원형이 되었다.

세종 24년의 『고려사』는 세종 30년에 활자본으로 인출되었다가(현재 부전) 남수문 등 수사관의 정실개입이 드러나면서 반포가 중지되었다. 그 후 세종 31년에 김종서·정인지·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 등이 왕명을 받아 다시 신개 등의 『고려사』 개찬(改撰)에 착수하였다.

『고려사』의 개찬을 시작하면서 그 개찬방침과 관련되어 신석조(申碩祖)·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등의 “기전체 고려사를 먼저 완성하고, 그 다음에 편년체의 『수교고려사』를 산윤(刪潤)하여 별도의 편년체 고려사를 편찬하자”는 주장과 어효첨(魚孝瞻)·김계희(金係熙)·이물민(李物敏) 등의 “기존의 『수교고려사』를 개정하여 반행하자”는 의론이 제시되었다.
이어 김종서·정인지 등의 주장에 따라 신석조 등의 논의를 쫓아 기전체의 고려사와 별도의 편년체 고려사를 개찬할 것을 결정하고 편찬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451년(문종 1)에 현전하는 기전체 『고려사』 139권을, 익년에는 현존하는 편년체 『고려사절요』 35권을 모두 완료하였다.

문종 1년에 찬진된 『고려사』는 1453년(단종 1)에 간행되어 반포되었고(현재 부전), 다시 1455년(단종 3)에 정인지를 총책임자로 하여 간행되었다(을해본, 『고려사절요』는 1453년(단종 1)에 김종서의 이름하에 갑인자로 간행).
또 중종대(1506~1544)에 을해본을 저본으로 한 목판본이 간행되어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에는 을해주자본과 을해주자본을 저본으로 하여 판각한 목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 현대에 이르러 일제식민지 당국과 고려사 연구자들의 요청에 따라 을해자본과 목판본을 저본으로 한 3종의 『고려사』가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즉 1908년 일본 국서간행회의 『고려사』(3책), 1955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의 『고려사』(본문 3책, 색인 1책), 1972년 아세아문화사의 『고려사』(3책)가 두루 통용되고 있다.

『고려사』에는 세종의 직서방침에 따라 정도전이 『고려국사』에서 참월하다 하여 격하한 모모왕 등의 명칭을 모조·모종 등으로 복구하였다.
그러나 『고려사』 편찬을 담당한 김종서·정인지 등은 학통상 왕조를 개창한 권근 등 관학파의 계승자이고, 동시에 원리원칙에 투철하고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이 현저하였다. 이에서 중국과는 달리 역대 국왕의 전기를 본기(本紀)로 표기하지 않고 세가(世家)로 표기하였고, 우왕과 창왕은 가짜 왕이라 하여 세가에 실지 않고 열전(列傳)에 실었다.

   또 공민왕 이후의 기사는 객관적인 서술보다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폄하하여 기술하는 경향이 현저하였다.

   예컨대 공민왕, 우왕, 창왕의 과오를 침소봉대하였고, 고려에 충성과 절의를 다한 최영·정몽주·이색 등을 폄하하고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 그 외에도 배불숭유정책에 따라 불교관계 기사를 제한하고 불교지(佛敎志)와 승려열전을 쓰지 않았다.

    2. 『고려사』 열전의 구성
  
『고려사』 열전은 조선왕조적인 입장, 성리학적인 군신·부자·부부관 및 충역관, 그리고 배불숭유의 사관을 토대로 고려의 대표적인 인물 949명을 후비, 종실·공주, 문·무제신, 양리·충의·효우·열녀, 방기·환자·혹리, 폐행, 간신, 반역, 신우 등 총 아홉 류로 구분하여 969쪽으로 서술하였다.
후비열전에서는 왕비·후궁 125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 가계, 입궁시기, 소생, 주요 행적을 2권(88~89) 36쪽에 걸쳐 서술하였다. 종실·공주열전에서는 왕자·종친 86명과 공주 23명을 시대순으로 어머니·출생년·책봉·주요행적·몰년·시호와 어머니·출생년·봉작·남편 등을 2권(90~91) 31쪽(각 26쪽, 5쪽)에 걸쳐 서술하였다.

문·무제신 열전에는 행적이 뚜렷한 문무반 507명(대개 1~2품관)을 시대순으로 자(字), 출신지, 가계, 입사로, 관력, 주요 행적, 졸년, 증직, 시호, 인물평, 자손 등의 내용을 29권 575쪽에 걸쳐 서술하였다. 양리·충의·효우·열녀열전에서는 행적이 뚜렷한 양리, 충의, 효자, 열녀 41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가계·관력·행적 등이나(양리.충의) 가계·행적 등을(효우·열녀) 1권 14쪽으로 서술하였다.

방기·환자·혹리열전에서는 21명을 시대순으로 가계, 관력, 행적 등을 1권 15쪽으로 서술하였다. 폐행열전에서는 60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가계·출사로·관력·행적·졸년·시호 등을 2권 37쪽으로 서술하였다. 간신열전에서는 26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가계·출사로·관력·행적·졸년·시호 등을 2권 48쪽으로 서술하였다.
반역열전에서는 50명을 시대순으로 출신지·가계·출사로·관력·행적·졸년·시호 등을 6권 109쪽으로 서술하였다. 신우·신창열전에서는 우왕과 창왕의 전기를 5권 105쪽으로 서술하였다.

이를 볼 때 『고려사』 열전은 세가에 포함되어야 할 신우열전을 제외할 때 문·무제신열전과 반역열전이 각각 인원수로는 54%(507/947명)와 5%(50/947), 분량으로는 63%(575/860쪽)와 13%(109/860)를 점하여 중심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 점과 본서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의 출자와 관련하여 문·무제신열전과 반역열전에 수록된 인물을 출전별로 구분하여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

    문·무제신 열전(권92~100)
 
  권 92: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최응, 최언위, 왕유, 왕자지, 박술희, 최지몽, 왕식렴,
              박수경,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진평, 공직, 박영규.
   권 93:서필, 최승로, 최제안, 쌍기, 최량, 한언공, 유방헌, 김심언, 최항, 채충순.
   권 94:서희, 서눌, 서공, 유진, 강감찬, 최사위, 황보유의, 장연우, 양규, 지채문, 지녹연, 하공진, 김은부,
              주저, 강민첨, 곽원, 왕가도, 김맹, 유소, 윤징고, 위수여, 전공지, 이주헌, 이주좌, 안소광, 조지린.

   권 95: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황주량, 유신, 왕총지, 위게정,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문정, 정문, 김원정, 손관, 최사량, 김선석,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김한충.
   권 96:최사추, 김인존, 윤관,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오연총.
   권 97:김부일, 김부의, 고영신, 김황원, 이궤, 곽상, 곽여, 유재, 호종단, 신안지, 김경용, 김인규, 최홍사,
              한안인, 이영, 한충, 임개, 유녹숭, 김준, 유인저, 강증, 허경, 문관, 정항, 정서, 김극검, 김약온.

   권 98: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정습명, 고조기, 김정순, 정극영, 박정유, 최사전, 김향, 최자성, 김진,
              임완, 최기우, 김수자, 최유, 이수, 이위, 허재.
   권 99:양원준,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이공승, 신숙, 한문준,
              문극겸, 유공권, 유택, 조영인, 왕세경, 이순우, 임민비, 최척경, 함유일,
염신약, 이지명,
              유응규, 유자덕, 현덕수, 최균, 최보순, 최윤개, 김거공, 한유한.

   권100:두경승, 우학유, 노영순, 조위총, 방서란, 박제검, 기탁성, 홍중 방, 경대승, 진준, 최세보,
              박순필, 이영진, 백임지, 이준창, 최충렬, 정세유, 정숙첨, 정안, 정국검, 이유성, 정방우, 정언진.
   권101:민영모, 민식, 송저, 김광중, 김체, 안유발, 최여해, 최우청, 왕 규, 차약송, 기홍수, 정극온,
              유광식, 권경중, 김태서, 김약선, 김미,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노인수, 김의원.

   권102:금의, 이규보, 이익배, 유승단, 김인경, 김승무, 이공로,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조문발,
               이수, 이순목, 김창, 송국첨, 최자, 하천단, 채송년, 손변, 권수평, 이순효, 송언기, 김수강,
               김지대, 이장용.
   권103:조충, 조변, 김취려, 김문연, 김변, 이적, 채정, 박서, 김경손, 김혼, 최춘명, 김희재, 이자성,
               김윤후, 김응덕.

   권104: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한희유, 나유, 나익희,
              원충갑,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권105:유경, 유승, 유돈, 유만수,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정가신,
               안향, 안우기, 안목, 설공검, 유천우, 조인규, 조서, 조련,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권106:백문절, 백이정, 박항, 곽예, 주열, 이주, 이행검, 장일, 김구, 이승휴, 이연종, 김훤, 김개물,
              정해, 정오, 정보, 정공권, 조간, 심양, 추적, 이인정, 채우, 김유성, 곽린, 윤해, 윤택, 이영,
              엄수안, 안진, 최수황, 박유, 홍규, 홍융.
   권107: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김련, 김부윤, 정인경, 권훤,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화, 권근, 민지, 민상정.

   권108: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김지숙, 김인윤, 정선, 이혼, 최성지, 최문도, 채홍철,
              김이, 이인기, 홍빈, 조익청, 배정지, 손수경.
   권109:박전지, 오형, 이진, 윤신걸, 박효수, 허유전, 박충좌, 윤선좌, 이조년, 이승경, 이곡, 우탁,
              안축, 안종원, 안보, 최해, 장항, 이성, 조렴, 왕백, 이백겸, 신군평.
   권110:최유엄, 김태현, 김광재,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왕후, 왕중귀, 한종유,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이능간.

   권111:염제신, 이암, 이강, 홍언박, 홍사우, 유연, 유탁, 경부흥, 김속명, 이자송, 조돈, 조인옥,
              최재, 송천봉, 홍중선, 김도, 임박, 문익점.
   권112:이공수, 유숙, 유실, 이인복, 백문보, 전녹생, 이존오, 이달충, 설손, 설장수, 한복, 이무방,
              정습인, 하윤원, 박상충, 박의중, 조운흘.
   권113:안우, 김득배, 이방실, 정세운, 안우경, 최영, 정지, 윤가관, 김장수.
   권114:윤환, 이성서, 이수산, 이염, 이승로, 이운목, 황상, 지용수, 나세, 김선치, 전이도, 구영검,
              오인택, 김보, 변광수, 이선, 정지상, 임군보, 나흥유, 목인길, 김유, 양백연, 지용기, 하을지,
              우인열, 문달한, 김주, 최운해.

   권115:이색, 우현보, 이숭인.
   권116:심덕부, 이림, 왕강, 박위, 이두란, 남은.
   권117:정몽주, 김진양, 강회백, 이첨, 성석린.
   권118:조준.
   권119:정도전.
   권120:윤소종, 윤회종, 오사충, 김자수.

  반역열전(권127~132)
  
권127:환선길, 이흔암, 왕규, 김치양, 강조, 이자의, 이자겸, 척준경, 묘청
   권128: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이의방, 이의민, 정방의, 조원정, 조석린
   권129: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권130:한순, 다지, 홍복원, 이현, 조숙창, 조휘, 김준, 임연, 임유무, 조이, 김유, 이추, 한홍보,
              우정, 최탄, 배중손.
   권131:조적, 조일신, 김용, 기철, 노책, 권겸, 최유, 홍륜, 김문현, 김의
   권132:신돈

 
 

 
  
3. 본서(『고려사』 열전)의 구성과 내용

   1) 구 성
   앞에서 서술하였음과 같이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인물은 949명의 다수이고, 그 내용상 문·무제신과 반역자가 중심이 되었다. 또 고려기의 시대구분을 보면 크게 무신집권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2시기로 구분되고, 전자와 후자는 다시 고려귀족사회가 정착되는 태조~정종대의 초기, 귀족사회가 융성한 문종~의종대의 중기, 무신이 집권한 명종~고종의 무신집권기, 몽고의 반속국이 된 원종~충정왕대의 원지배기, 원의 지배를 극복하고 사회·경제개혁을 도모하던 말기의 5시기로 구분된다. 따라서 열전의 체제로는 고려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교양세미나’강좌에 합당한 교재를 저술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었다. 이에서 역주자는 이 양자를 조화시키면서 고려의 인물을 서술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하에 본서에서는 『고려사』 열전의 인물을 크게 시대별과 분야별의 2부분으로 나누었다. 다시 시대별로는 초기, 중기, 무신집권기, 원지배기, 말기의 5장으로 나누고 각 시대상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 5명 내외를 표집하여 서술하였고, 분야별로는 고려 일대의 사상가·역사가, 직언가·아첨가, 예술가·점복가·의사·양리·충의·혹리·효자·열녀의 3장으로 나누고 각 분야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 6~8명을 표집하여 서술하였다. 이 중 최충, 김취려, 최영, 신돈에 있어서는 그 활동시대나 논급될 부분의 성격과 정확히 부합되지는 않지만, 동인물의 행적이나 출신 등과 관련하여 중심이 되는 부분에서 서술하였다. 각 장별 수록 인물은 다음과 같다(( )는 출전).

   제1장 초기의 정치가와 장군:최승로(『고려사』 권93), 최충(95), 서희 (94), 강조(127), 강감찬(94).
   제2장 중기의 자주가와 사대가:윤관(96), 묘청(127), 이자겸(127), 김부식(98).
   제3장 무신집권기의 무신과 문신:정중부(128), 최충헌(129), 조위총 (100), 문극겸(99), 이규보(102).
   제4장 몽고지배기의 항몽가와 친몽가:김윤후(103), 김준(130), 배중손(130), 홍복원(130),
             김취려(103), 조인규(105), 기철(131).

   제5장 말기의 혁명가와 절의가:조준(118), 정도전(119), 최영(113), 이색(115), 정몽주(117).
   제6장 유학자, 승려, 도참가와 역사가:안향(105), 이제현(110), 의천(90), 신돈(132), 김위재(122),
             이승휴(106).
   제7장 직언가와 아첨가:정습명(98), 신숙(99), 이존오(112),
염승익(123), 인후(123), 강윤충(124).
   제8장 예술가, 점복가, 의사, 양리·혹리와 효자·열녀:이영(122), 오윤부(122), 설경성(122),
            정운경(121), 심우경(122), 정의(121), 김천 (121), 강호문처 문씨(121).

  2) 내 용
제1장 초기의 정치가와 장군에서는 문물제도를 정립하고 외침을 격퇴하여 국체와 귀족사회의 토대 확립에 기여한 정치가와 장략가를 서술하였다.
최승로(927~989)는 학행으로 출사하였다. 이후 주로 문한직을 역임하고 982년(성종 1) 구언교지에 응하여 「시무책 28조」를 올려 유교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지표를 제시하였다. 이후 성종의 지우를 받고 문하시랑평장사와 수문하시중을 역임하면서 성종초의 정치를 주도하였다.

최충(984~1068)은 문과를 거쳐 출사하였다. 1013년(현종 14)에는 수찬관으로서 태조~목종의 『7대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037년(정종 5)에는 수국사로서 『현종실록』의 편찬을 지휘하였다. 1041년(정종 7) 이후에는 내사시랑평장사나 문하시중 등으로서 정치를 주도하면서 서북면의 방어책을 지휘하고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여 국가의 토대를 다졌다. 이어 1053년(문종 7) 문하시중에서 퇴직한 뒤에는 9재학당을 세우고 후진의 교육에 헌신하여 불교의 융성으로 쇠퇴한 유학진흥의 기틀을 다졌다.

서희(942~998)는 문과를 거쳐 출사하였다. 982년(성종 1)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10년간 단절되었던 송과의 국교를 복구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이 침입하자 중군사로서 북계에 파견되어 고려군을 지휘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전세가 불리하다 하여 거란의 요구에 따라 항복하거나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강화를 맺고자 하였지만, 서희는 이에 극력으로 반대하고 적장 소손녕과 담판하여 거란군을 퇴각시켰다. 994년(성종 13) 청천강 이북에 살던 여진족을 축출하고 서해안 요지 6곳에 성을 쌓아 이후 거란의 거듭되는 침입에서 고려가 승리하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강조(?~1010)는 1009년(목종 12) 서북면도순검사로 재직하던 중 쿠데타를 일으켜 국정을 전횡하면서 국가를 어지럽히던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제거하고 집권하며, 이어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여 혁신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010년(현종 1) 그의 정변을 기화로 거란군이 내침하자 행영도통사가 되어 동주에 나가 맞아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으며, 거란황제의 회유를 끝까지 거절하고 살해되었다.

강감찬(948~1031)은 문과를 거쳐 출사하였고, 1010년(현종 1) 거란 침입 때에는 예부시랑으로서 항복하자는 여론에 반대하고 하공진으로 하여금 거란을 설득하여 퇴각하게 했다. 1019년(현종 9)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로서 군사를 지휘하여 전년에 침입한 거란군을 흥화진과 구주에서 대파하여 이후에 전개되는 평화와 안정의 토대를 놓았다. 이후 문하시중에까지 승진하면서 정치를 주도하였다.

제2장 중기의 자주가와 사대가에서는 여진(금)의 대두, 귀족사회의 융성에 따른 문약과 함께 초기 이래의 자주정책을 계승하려는 인물과 현실에 안주하면서 금에 사대하려는 인물을 서술하였다.
윤관(?~1111)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1095년(숙종 즉위)과 1098년에는 요와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수호를 닦았다. 1104년(숙종 9)에 왕의 뜻에 따라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로 파견되어 여진을 정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직후 그 실패가 여진의 기마군 때문임을 역설하여 별무반을 창설하고 기병을 육성하게 하였다. 이어 1107년(예종 2) 부왕의 유지를 계승한 예종의 뜻을 받들어 여진정벌군 원수로 출병하여 여진을 정벌하고 함흥 이북에 9성을 축조하였다. 다음 해에 개선하여 공신에 책록되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에 승진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1108년 여진이 계속 침범하자 이를 격퇴하기 위하여 다시 출전하였다가 조정의 강화지시로 9성을 여진에 돌려주고 귀환하여야 했으며,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직되는 등 여진정벌의 성과가 퇴색되는 수모를 겪었다.

묘청(?~1135)은 도참설로서 정계에 진출하고, 1127년(인종 5)에 왕실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이후 백수한·정지상 등을 규합하여 이자겸난으로 상심한 인종과 백관에게 “개경은 지덕이 쇠하였으니 지덕이 융성한 서경으로 천도하여 중흥을 도모하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서경천도를 도모하였다. 일시는 인종의 뜻을 얻어 서경에 궁궐을 신축하고 국왕이 이어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과 김부식 등 개경귀족의 반대로 천도가 좌절되자 강제로 천도를 실현하고 칭제건원 등의 혁신정치를 실행하기 위하여 1134년(인종 12)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김부식 지휘하의 개경군에게 토벌을 받고 배반한 서경유수 조광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자겸(?~1126)은 음서로 출사하였고, 일시 누이동생인 순종비의 난행에 연좌되어 면직되기도 하나 1108년(예종 3) 둘째 딸이 예종비가 되면서 갑자기 재상에 발탁되었다. 이후 1126년(인종 4)까지 예종의 국구로서나 인종의 외조부·국구로서 정치를 주도하고 전횡하면서 대금사대 등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왕위찬탈을 도모하다가 인종의 혐오와 왕측에 회유된 심복 척준경의 배반으로 유배된 후 사망하였다.

김부식(1075~1151)은 문과를 거쳐 출사하였다. 인종초에 이자겸의 전횡을 과감하게 경계하였고, 『예종실록』의 수찬에 참여하였다. 1134년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극력으로 반대하여 좌절시켰고, 1135년(인종 13)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자 평서원수(平西元帥)로 출전하여 다음 해에 진압하였다. 그 후 공신에 책록되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에 승진되어 정치를 주도하였으며, 왕명을 받아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삼국사기』 편찬을 주관하였다.

   제3장 무신집권기의 무신과 문신에서는 무신집권자와 무신집정의 배려 아래 정치에 참여하였던 인물을 서술하였다.

정중부(1106~1179)는 용력으로 출사하였다. 1170년(의종 24) 상장군으로서 이고·이의방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문신을 대량으로 살육하면서 집권하였고, 이후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처음에는 이고와 이의방의 전횡으로 다소 위축되었지만, 1174년(명종 4) 이의방을 제거한 후부터 사위 송유인(宋有仁)과 함께 전횡하다가 경대승에게 살해당하였다.

최충헌(1149~1219)은 부음으로 출사하였다. 1196년(명종 26) 상장군으로서 동생 충수와 함께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였고, 왕에게 「봉사10조」를 올려 누적된 폐정의 개혁을 도모하였다. 이후 동생 충수 등 유력한 정적을 대량으로 숙청하고, 도방과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세력기반으로 삼으면서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판병부어사대부, 교정별감 문하시중 등으로서 정치, 군사, 재정, 감찰 등 모든 국정을 관장하였다. 집권기를 통하여 4왕을 옹립하고(신종·희종·강종·고종) 3왕을 폐위하며(명종·신종·희종),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전횡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민란을 진압하고, 기강을 확립하고, 풍속을 순화하며, 문운을 진흥하였다. 또 강력한 권력기반을 구축하여 항몽을 가능하게 하였다.조위총(?~1176)은 병부상서 서경유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1174년(명종 4),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 전횡을 일삼던 정중부·이의방 등을 제거하고 의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반무신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서북면 40여 성의 호응을 받고 개경 교외에까지 진출하였으나, 이의방군의 역습을 받아 진압되고 참형을 당하였다.

문극겸(1122~1189)은 음서로 출사하고 다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170년(의종 24) 전중내급사 재직중에 정중부 등의 쿠데타군에 포로가 되었으나 좌정언 때에 직언하였던 일로 화를 면하고 이후 무신정권에 협조하고 상장군,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 권판이병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문신을 많이 구하였다.

이규보(1168~1241)는 문과를 거쳐 출사하였다. 사관 초에는 불우하였으나 1207년(신종 3) 집정 최충헌의 인정을 받아 현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최충헌·최이의 총애를 받으면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1233년(고종 20) 지문하성사 판예부사가 되고,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예부사로서 치사하기까지 문한을 주관하고 문운의 진흥에 공헌하였다.

   제4장 몽고지배기의 항몽가와 친몽가에서는 몽고에 저항한 인물과 몽고에 투항하거나 아부하면서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권력을 농간한 인물을 서술하였다.

김윤후(신종~원종대)는 승려로서 백현원(白峴院)에 있다가 1232년(고종 19) 몽고가 침입하여 처인성(용인)을 공격할 때 적장 살리타이를 쏘아 죽여 몽고군을 본국으로 퇴각하게 하였다. 뒤에 다시 충주산성방호별감으로서 동성을 포위공격하는 몽고군을 격퇴하고 감문위상장군에 승진하였으며, 이후 추밀원부사를 역임하고 수사공상서우복야로 치사했다.

김준(?~1268)은 최충헌의 가노이나 절륜한 무예로 최이에게 발탁되면서 사관하고, 이후 최이·최항의 측근에서 위세를 부렸다. 최의가 집권한 후 권력에서 소외되자 1258년(고종 45) 유경 등과 공모하여 최의를 살해하고 집권하였고, 이후 공신에 책록되고 교정별감, 문하시중 해양후 등으로서 원종을 중심한 대원강화세력에 맞서 항몽을 도모하다가 배반한 심복 임연에게 살해당하였다.

배중손(?~1271)은 삼별초지유로 재직하다가 1270년(원종 11) 개경정부의 환도령과 항몽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삼별초의 병적을 압수하자 야별초지유 노영희(盧永禧) 등과 공모하고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켜 항몽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진도를 중심으로 전라·경상도 연안지역을 석권하였으나, 이듬해 여·몽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진도가 함락당할 때에 전사했다.

김취려(?~1234)는 음서로 출사하였다. 1216년(고종 3) 거란군이 대거 서북면으로 침입하자 대장군으로서 후군병마사가 되어 거란군을 대파시키고 금오위상장군에 승진하였다. 이후 1219년(고종 6)까지 제천, 강동성 등지에서 고려군을 지휘하거나 몽고군과 합동으로 거란군을 섬멸하였다. 그 뒤 참지정사 판호부사, 중서시랑 판병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홍복원(1206~1258)은 1231년(고종 18) 몽고가 침입할 때 항복했고, 몽고가 철군하자 서경에 낭장으로 있다가 1233년 필현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최우의 토벌을 받고 몽고로 도망가서 동경총관이 되었다. 이후 몽고의 침입 때마다 앞잡이로 들어와 온갖 만행을 부리다가 몽고에 볼모로 가 있던 영녕공(永寧公) 준()을 저주한 일로 몽고 황제가 보낸 장사에게 맞아 죽었다.

조인규(1227~1308)는 능숙한 몽고어를 통하여 출사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성절사가 되어 원에 다녀왔다. 이후 1307년(충렬왕 33)까지 원실과 충렬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원으로부터 선무(宣武)장군 왕경단사관, 고려국왕부단사관, 고려로부터 지도첨의사사, 판군부사사, 도첨의시중, 판도첨의사사 등에 각각 제수되면서 30여회에 걸쳐 원에 사신으로 내왕하는 등 여원외교와 고려국정을 주도하였다.

기철(?~1356)은 1340년(충혜왕 복위 1) 누이동생인 기황후의 후광으로 원과 고려로부터 행성참지정사와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제수되었다. 이후 기황후의 세력을 믿고 고려왕을 능멸하고 내외에 횡포를 부리다가 배원정책을 실시한 공민왕에게 살해당하였다.

  참고 및 연구 대상 : 행주기씨의 족보에 서원인 염돈소(廉敦紹)가  기철의 매부이며, 기황후의 형부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 족보나 기타 어디에도 이분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아 연구 과제라 봄(2005년 염명선)

   제5장 말기의 혁명가와 절의가에서는 사회·경제를 광정하여 신국가를 개창하려는 인물과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거나 점진적인 개혁을 도모하다가 혁명파에게 화를 당한 인물을 서술하였다.

조준(1346~1405)은 음서를 거쳐 출사하고 다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2년 도통사 최영 휘하의 체찰사로서 왜구를 토벌했고, 다음 해에는 다시 도검찰사로서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공신에 책록되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 후에 이성계파에 가담하여 지밀직사사 겸대사헌에 발탁되고, 곧 이어 전제개혁안을 상소하였으며, 1390년 지문하부사 겸대사헌으로서 전제개혁을 주도하였다. 1392년(공양왕 4) 정도전 등과 이성계 추대를 주도하였다.

정도전(?~1398)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경부흥 등의 친원배명정책을 반대하여 유배되었고, 이후 수년간 좌절을 겪기도 하나 1383년 동북면으로 이성계를 찾아보고 그의 참모가 되면서 뜻을 펴기 시작하였다. 1385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에 발탁되었고,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집권한 뒤에 지문하부사 겸대사헌, 우군총제사, 정당문학 등으로서 이성계파의 중심이 되어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 옹립, 전제개혁, 이성계 추대 등사를 추진하였다.

최영(1316~1388)은 음서로 출사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안우의 휘하에서 조일신의 난을 토벌하였고, 1358년 양광전라도 왜적체복사가 되어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후 우왕 때까지 6도도순찰사, 6도도통사, 해도도통사 등의 각급 관직을 띠면서 수십 차에 걸쳐 최유의 침입, 김용의 난, 홍건적의 침입, 제주목호의 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보전하였다. 1388년(우왕 14)에는 이성계와 함께 권신 임견미·염흥방을 제거하고 집권하였다. 그러나 8도도통사가 되어 요동정벌을 도모하다가 이성계 등의 위화도회군으로 유배된 후 살해되었다.

이색(1328~1396)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고, 다시 원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원에서 귀국하여 공민왕의 전폭적인 신임하에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지제고 겸병부낭중에 발탁되어 문·무관의 인사행정과 문한을 주관하면서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였다. 이후 우왕말까지 대사성, 대제학, 판삼사사 등의 각급 관직을 역임하면서 문한을 주도하고 성리학의 육성에 기여하였다. 1389년(창왕 1) 위화도회군 직후 이성계일파가 우왕을 폐위하자 조민수와 함께 이성계일파의 의견을 물리치고 창왕을 옹립하였고, 이후 창왕을 보호하고 고려왕실을 지속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이성계일파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함에 따라 실각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몽주(1337~1392)는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이색의 지휘하에 성리학의 육성에 참여하였다.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에 반대하고 유배되기도 하나, 곧 복직되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84년(우왕 10) 명에 파견되어 공민왕 사후 단절되었던 명과의 국교를 회복시켰다. 1389년(창왕 1) 문하찬성사로서 이성계 등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고, 1390년(공양왕 2)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사사에 승진하였다. 이후 이성계일파의 역성혁명 의도를 간파하고 이들에 맞서 고려왕실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제6장 유학자, 승려, 도참가와 역사가에서는 고려일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승려, 도참가와 역사가를 서술하였다.

안향(1243~1367)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이후 내외관을 역임하면서 청렴공정한 정사로 신망을 얻었다. 1288년(충렬왕 14) 왕과 왕비를 호종하고 원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 왔다. 이후 도첨의중찬 이하의 각급 관직을 역임하면서 주자학의 연구와 육성에 헌신하여 성리학이 정착되는 토대를 놓았다.

이제현(1287~1367)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1314년(충숙왕 14) 백이정(白正)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수업하였고, 충선왕의 부름에 쫓아 연경의 만권당(萬卷堂)에 가서 요수·조맹부 등과 교유하였다. 이후 도첨의정승·문하시중 이하의 각급 관직을 역임하면서 원의 부당한 간섭과 압박으로부터 국왕을 보호하고 국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진력하였으며, 주자학의 육성에 노력하였다.

의천(1055~1101)은 문종의 네 번째 왕자로서 1065년에 출가하였다. 그 신분에 힘입어 1067년(문종 21) 13세에 교종의 최고 법계인 승통에 올랐다. 1084년(선종 1) 송에 들어가 각지를 순방하면서 고승대덕을 방문하고 화엄·천태학을 수학하면서 깊은 경지를 체득하였다. 1086년(선종 3) 귀국과 함께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고, 이어 이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속장경』을 간행하였다. 이후 숙종에게 건의하여 화폐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하였고, 천태종을 개창하여 교종과 선종의 교단통합을 도모하였다. 천태종은 그의 사망과 함께 쇠퇴하였지만, 그의 교선통합 사상은 후일 조계종이 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신돈(?~1371)은 어려서 출가하여 재행으로 명성을 얻었다. 1365년(공민왕 14) 정치를 개혁하려는 공민왕의 총신을 받아 국정을 대행하면서 정치·경제·사회 개혁을 주관하였다. 특히 1366년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을 중심한 노비·토지개혁은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받아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곧 반개혁파의 반발과 공민왕의 신임이 철회됨에 따라 반역의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다가 참형되었다. 사후에는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일파에 의해 간계로 자식을 낳아 공민왕의 후사가 되게 한 요승으로 매도되었다.

김위재(고려중기)는 박식한 도참사상으로 출사하였다. 1097년(숙종 2)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으로서 『도선기』, 『삼각산명당기』, 『신지비사(神誌秘事)』 등 도선의 도참설을 들어 남경(한양)에 천도하여 왕업을 흥왕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이 주장은 숙종에 의해 받아들여져 남경이 경영되는 토대가 되었다.

   이승휴(1224~1300)는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향리에 퇴거하여 학문연마에 주력하였다. 원종말에 이장용(李藏用)·유경(劉敬)의 천거로 출사하였고, 이후 충렬왕 초까지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고 향리에 물러나 1287년(충렬왕 13)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1298년(충선왕 즉위)에 충선왕의 신임을 받아 사림시독학사 간의대부에 발탁되어 민간의 이해와 시정의 득실을 주청하기도 하나 연로를 들어 사직하였다.

   제7장 직언가와 아첨가에서는 고려일대에 걸쳐 신명을 던져 간쟁한 대표적인 인물과 국왕에게 영합하여 사리사욕과 권력을 누린 총신(폐행)을 서술하였다.

정습명(?~1251)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시독(侍讀)으로서 세자 때의 의종을 성실히 보도하였고, 이로 인해 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승선에 승진하고 세자를 잘 보필하라는 유명을 받았다. 의종 즉위초에 한림학사와 지주사로 재직하면서 의종의 방자한 언행을 시정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지만, 그의 강직함을 기피한 왕과 폐신인 김존중(金存中)·정함(鄭) 등의 무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숙(?~1160)은 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의종초에는 낭관으로서 왕의 방탕한 사생활을 극간하였고, 1158년(의종 12) 지문하성사로서 다시 왕이 환관 정함을 조신에 제수하자 극간하여 철회시켰다.

이존오(1341~1371)는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1366년(공민왕 15) 우정언으로서 집정 신돈의 횡포를 극간하고 왕의 노여움을 사서 장사감무로 좌천되었으며, 곧 은거하였다가 신돈의 횡포를 통탄하면서 울분 속에 죽었다.

염승익(?~1302)은 악질을 불공으로 치료하고 명성을 얻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지저(李之氐)의 천거를 받아 1278년(충렬왕 4) 필도치(必闍赤)에 제수되면서 충렬왕의 총신이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인후(1250~1311)는 몽고인으로 제국(齊國)공주(충렬왕비)의 종으로 출래하였고, 그 출신과 공주에 인연하여 충렬왕의 총신이 되었다. 이후 원으로부터 진변만호부 다루가치와 고려로부터 첨의시랑찬성사 판병조감찰사사 등을 역임하였고, 흥법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천리감찰사사(與法佐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中贅 上將軍  判典理 監察司事)에 이르렀다.

강윤충(?~1359)은 천예출신으로 충숙왕 이후로 역대 왕의 총신이 되었다. 정방제조, 판삼사사 이하의 각급 관직을 역임하면서 음행을 자행하고 정치를 농간하다가 1356년(공민왕 5) 호군 임중보(林仲甫)의 반역에 연좌되어 현령으로 좌천되었다가 살해되었다.

   제8장 예술가, 점복가, 의사, 충신, 양리·혹리와 효자·열녀에서는 고려일대의 대표적인 화가, 점복가, 의사, 충신, 양리, 혹리, 효자, 열녀를 서술하였다.

이영(고려중기)은 그림솜씨로 인종과 의종의 총애를 받고 궐내의 모든 회화사를 담당하였다. 인종 때 송에 들어가 휘종의 명으로 『예성강도』를 그려 명성을 떨쳤다.

오윤부(?~1304)는 점복으로 출사하여 충렬왕의 총신이 되고 도첨의찬성사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여타의 총신과는 달리 왕의 언행과 시정에 대해 과감하게 직언하여 정사에 기여함이 많았다.

설경성(1237~1313)은 충렬왕 때에 의술로 상약의좌(尙藥醫佐)에 제수되면서 출사하였다. 이후 충렬왕과 원의 세조·성종의 병을 고쳐 명성을 떨치고 고려왕과 원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찬성사까지 올랐지만, 분수를 지킨 언행으로 상하의 신망을 받았다.

정의(?~1233)는 1233년(고종 20) 대장군으로서 필현보(畢賢甫)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위유사로 파견되어 동난의 진압을 도모하려다가 필현보에게 사로잡혔으며, 필현보의 반군지도자 추대를 끝까지 거절하고 살해되었다.

정운경(?~1366)은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이후 근면성실한 성격과 청렴공정한 정사로 형부상서를 거쳐 검교밀직제학으로 퇴직하기까지 상하의 깊은 신망을 받았다.

심우경(고려말)은 계림부판관 재직중에 각박하고 혹독한 형정으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죽였다.

김천(고려후기)은 명주의 아전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몽고군에 포로로 잡혀간 모친과 동생을 구해내고, 효행과 우애를 다하였다.

강호문의 처 문씨(고려말)는 왜군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함으로써 생명을 건지고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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