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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수 염사치

진한의 우거수 염사치

 

   진한우거수(辰韓右渠帥) 염사치(廉斯)의 사화(史話)

  삼한 주위 토착사회(三韓周圍土着社會)의 거수(渠帥)로써 한(漢)의 문물을 흠모하여 그 군현(郡縣)에 자진하여 투항하는 자도 있었으니 유명한 진한우거수 염사치(廉斯)의 낙랑귀화(樂浪歸化)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염사치에 관한 사화(史話)는 위의 위지기사(魏志記事)에 대한 배송지 주(裵松之 註)에 인용된 위략(魏略)에 자세히 나타난다.

.王莽(왕방)  지황년간(地皇年間) 서기 20~23년에 염사치가 진한우거수(右邊渠帥)로 있을 때 낙랑의 토지가 기름지고 인민이 다 잘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투항(歸化)하려 하여 자기의 읍락(邑落)을탈출(脫出), 순망중(巡亡中), 밭 가운데 새(雀)를 쫓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용어가 한인과 다르므로 이유(理由)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되,  "우리는 본래 한인인데,  나의 이름은 호래(戶來)라 한다. 우리들 1천5백인이 재목을 벌채하다가 한인에게 잡히어 머리를 깍고 종(奴隸)이 된지 3년이 된다" 라고 하였다. 

  '치()'가 이르되 내가 지금 낙랑에 투항하러 가는 중이니 너도 같이 가지 아니 하려느냐?하매 호래는 좋다고 하였다.  호래를 데리고 낙랑 함자현(合資縣)에 이르러 사유(事由)를 말하니, 현에서는 곧 '치'를 통역(使譯)으로 삼아 금중(芩中)에서 대선(大船)을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와 호래의 항반배(降伴輩)를 내 놓아라 하여 생존자(生存者), 1천인을 얻었으나,  나머 것  5백인은 이미 죽었다. '치'가 진한(당국자)에게 이르기를 "네가 그 5백인을 마져 돌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에서 만병(萬兵)을 보내어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칠 것이다. 진한(당국자)는 가로되 "5백인은 이미 죽었으나 그 대신 배상을 물겠다하고 진한인 만5천인과 변한포(弁韓布) 만5천필을 내 놓았다. '치'는 그것을 가지고 낙랑으로 갔다. 군(郡)에서는'치'의 공적을 표창하여 관책(冠幘)과 전택(田宅)을 주고 자손(子孫)이 수대 계승(數代 繼承)하여 안제연충4년(安帝延忠四年  서기125년)에 이르도록 부세(賦稅)의 면제(免除)를 받았다.

위지 위략 원문(魏志 魏略 原文)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言非韓人 問之, 男子曰 :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 韓戶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曰 : "我當降 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 ... "可.. (辰) 因將 戶來 (來) 出詣 含資縣,  縣言郡, 郡 卽以 爲譯, 從芩中 乘大船入 辰韓, 逆取 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時曉謂 辰韓 : "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 : "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收取直還. 郡表<>功義, 賜冠幘,  ·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三國志 魏書 東夷傅 第30  213쪽)

  이 염사치의 사화(史話)는 앞에서 말한 동이인 한민족(東夷人 韓民族)은 동성불혼(同姓不婚) 하였다는 기사(記事)  바로 밑에 나오는 설화(說話)로써 염사인이 비록 지명(地名)이라 하더라도 연세대 정법대학 김주수 박사설(金疇洙 博士說) 같이 지명(地名)에 따른 성씨(姓氏)가 된 증거이며 또 김주수교수의 친족상속법 356쪽 "성과 본"을 원용(援用)하면 삼한시대 신지(臣智)와 거지(巨智)라는 특수한 동이군장(東夷君長) 혹 대인 칭호(大人稱號)가 원인(原因)이 되어 염(廉)이라고 불렀다(廉之號)와 서로 관계있는 개념(槪念)으로 성씨(姓氏)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사화중(史話中)에 나타난 인수, 포수(人數  布數)에 대하여는 그것이 얼마만큼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지 자못 의심스러우나 기타는 인명, 지명, 연대 등 구체적인 기사가 보이므로 대체로 사실에 가까운 사화(史話)라 할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 먼저 주의 할것은  "우거수"니 "염사치" 니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른바 진한은 전체사실을 통하여 보면 글자 그대로의 진(辰)의 객체인 한(辰韓)의 위(謂)가 아니라 진(辰)의 주체(主體)요. 한(韓)의 맹주격(盟主格)인 고한(高韓'辰')과 혼동(混同)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고 우거수(右渠帥)는 우변거수(首長) 뜻.  염사는 진한, 마한 50여국 가운데 나타나지 아니한 국읍(國邑)의 이름으로 지금의 서산시 해미(海美)인둣 하고  '치'는 순정히 인명이라기 보다 우리나라의 우두머 리 수장(首長)의 사음(寫音)인  지,우,차(智 友 借)와 같은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치'가 호래(戶來)를 만난 지점은 어디인지 알수 없으나 위 읍락(邑落)인 염사에서는 좀 떨어진 곳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  함자현(含資縣)은 이미 낙랑(樂浪)의 한 속현(屬縣)으로 지금 황해도 서흥(黃海道 瑞興) 부근에 해당하니 염사가 이곳에 와서 사유를 말한것은 함자현이 정히 정히 낙랑군청방면에 통하는 안충(安衝)에 해당하였던 까닭이다. '치'로써 사역(使譯)을 삼는 것은 그가 진인(辰人)으로 진의 지리에  밝고 또 한어(漢語)에 통하였던 때문이다.  그가 낙랑의 사명(使命)을 받들고 대선(大船)을 타고 온것은 다수(多數)란 호래의 항반배(降伴輩)를 역취(逆取)해올 준비(準備)로써 황해와 같은 대해(大海)를 항로(船路)로 취한 소이(所以)였을 것이다.

  교섭의 대상자인 소위 진한은  즉 진의 최고맹주국 마한(最高盟主國 馬韓의)인 목지국(目支國 - 지금 직산부근)을 이름이니, '치'는 지금 황해도 일각에서 대선을 타고 아산만으로 들어와  상륙한 것이라  하겠다.  배상물(賠償物) 가운데의  모한포(牟韓布)는 변한포(弁韓布)의 오(誤)로 볼 것이나 그 수량에 대하여는 인수와 같이 의문으로 여기는 바이다.   위의 사화에서 시사(示唆)되는 바는 당시 낙랑방면의 한인이 목재를 채벌 하기 위하여 주위토착사회(周圍土着社會)의 지대에 까지 침입(侵入)한 것과 그때 진(辰)의 법속(法俗)이 외국포로(外國捕虜)를 노예로 삼되,  머리를 깍아 유포케 하였음과 또 진인(辰人)으로서 낙랑방면의 경제 생활과 문화생활을 흠모하여 투항하는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치'가 선례(先例)를 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그 후 얼마 아니하여 염사인의 낙랑에 조알(朝謁) 조공(朝貢)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光武帝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 蘇馬諟等詣樂浪, 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광무제 건무 20년(서기 44년)은 왕망(王莽)의 지황년간(地皇年間)에서 20여년후 밖에 되지 않고 소마시(蘇馬諟)는  역시 염사부락의 주사(主帥)였으며 "위한염사읍군, 사속, 낙랑군(爲漠廉斯邑郡  使屬  樂浪君)"은 소위 조알(朝謁)과 조공(朝貢)에 대한 한의 의례적(儀體的)인 봉작(封爵)과 형식적인 부용관계(附庸關係)를 말한 것에 불과하다.

  후한서 광무제기(光武帝紀) 같은 해 건무 20 년 조(條)에 "秋 東夷 韓國人 率象 謁樂浪 內附(추 동이 한국인 율상 알낙랑)" "가을에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 임금을 궁전에서 만나뵙고 들어와 붙었다."  한것도 위의 소마시 등의 조알(朝謁)을 자칭한 것임을 더 말할 것 도 없다.    생각컨데 소마시는 낙랑에 귀화한 염사치에 대신하여 그 후임자자로서 (主帥)가 되었던바  그도 역시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  ; 그 전날 중국의 강한  세력에 따르고 복종하여 안전을 유의하려던 사상과 허영주의자(虛榮主義者) : 허영에 들뜬 자가 되어 소위 조알(朝謁)의 예를 닦고 한으로부터 읍군(邑君)의 봉작(封爵)을 받았던 모양이다. 진한 양한과 한군현과의 교섭 관계가 빈번했듯이 변진인(弁辰人)과 왜인(倭人 : 일본인)과의 왕래 교통도 일찍부터  열리고 잦았음은 지리 상 자명한 이세(理勢)라 하겠다.  이상은 이병도 박사의 설명이다. 

   참고로 말할 것은 1982년부터 대한민국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가 내용을 바꾸어 나오게 되었다.  다음의 논설(論說)에 앞서 참고하기 위하여 인용한다.  

   백제의 발전 : 한편 백제는 그 국력을 크게 뻗쳐 4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진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요서 지방을 점령하고,  이어서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큐우슈우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이처럼 백제인은 요서지방, 큐우슈우지방, 그리고 본국을 연결하는 활동무대를 확보하여 활발하게 해외 진출을하였다.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요서지방(遼西地方)이라 함은 중국 요하(遼河) 서쪽 일대의 지역을 모두 이르는 말로, 1954 년 요동성(療東省)의 대부분과 합쳐 요령성(遼寧省)이 되었음. 성도(省都)는 금주시(錦州市) 이다. 민족사학자 이시며 문학박사이신 고 최동(崔棟) 선섕의 저서,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224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염사치사화의 진한은 요동반도에 래도(來到) 하였다가 조선인관리에게  발각되어 3년간이나 피금(被擒) 된 것이 었다.

  위의 염사읍은 현재의 여순지방(旅順地方) 인둣하다.  여순의 발음이 고대(古代) 염스(廉斯)에서 유래할 수도 있고,  또 지리적으로도 부합된다.  '치'는 두목의 의미인둣하다.  당시 한의 낙랑군치소(樂浪郡治所)는 소위 낙랑현(樂浪縣)이라는 곳이며, 소위 서부 낙랑군의 평양(平壤)(襄平) 이었으니  대능하하류(大凌河下流) 동쪽 해안지대였고 함자의 소능하하구(小凌河下口)의 소위 "대수서지...함자입해(帶水西至 含資入海)"의  함자현이 었으니 대수(帶水)가 소능하이었으므로 함자는 소능하의 하구의 해안도시였다. 또 낙랑군의 관리가 승선한 금중(芩中) 이었다고 하면 금중은 대능하구 지방의 대삼각주 부근의 려초(廬草)가 무성한 어촌인 듯 하다.

  금(芩)은 일본 서천씨에 의하면 염분이 있는 습지에 무성하게 자라는 수초라 한다. 요컨데 낙랑군의 치소와 함자현이 멀지 않은 지점에 있었고 또 함자, 금중이 진한의 대안지(對岸地)  이 었다는 점은 대능하구(大凌河ㅁ)의 대안지 요동반도를 의미 한 것이다. 
   만일 이 삽화(揷話)에 관한 진한을 조선반도 남단 동방으로 착각할 때에는 거의 만리나 해안선을 우회하는 일종의 넌센스의 희극이 발생한다.  같은 책 677페이지에 한인,  염사읍군은 동이 한국인이라 하니 일견 조선반도내에서 발생한  사건 (事件) 같으나 실제로는 조선반도내가 아니라 요동반도내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특히 염사읍은 조선반도내에서는 미문(未聞)의 읍명이로되 당시부터 약 20년전,  왕망지황년간(서기 22년)에 진한지의 염사읍인 '치'가 진한인으로써 한락랑군엣 투항할 의사 운운의 기사가 있으나 그 동일한 염사읍은 요동 반도내의 진한의 구명(舊名)을 가졌던 염사읍거수 이었으며 요동반도가 「古代의 辰韓」의 남방이었던 것이 분명하고 또 그 당시 한낙랑군에서 사실상 이탈 제외된 예인(穢人)의 자치국 으로서의 고구려에 내속하였던 고로 염사읍군의 '치'라는 자가  인방(隣方)의 한의 낙랑군에 투항을 자원하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기왕에 평양과 또 요동반도 남단까지 남하 진출하였으니 동이인이 한인도 되고 또 예인으로 기재되지 아니하고 한인이라고 하였으니 초학자(初學者)에게는 혹 조선반도내의 한국인으로 착각하기 용이 하다.  그러나 사실은 요동반도의 조선인을 지칭한 것이며, 이를 계기로 기억 할것은 금후 즉 후한 및 위(魏) 시대의 한인(韓人)에 관한 기사는 대부분 요동반도의 한국인 즉,  예인을 언급한 것이었다.  전기의 한인 염사, 소마시에 관하여 한인을 진한인으로 의(擬)함은 가당하거니와 충청도지방을 진한지로 비정(比定) 함은 오해이다.  그것은 한(漢書)에 진국과 진한을 구별 못함에 기인한 착각이며 당시의 진한은 요동반도이 다.

   북한 "사회 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발간된 「조선천사」를 통해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친살수(薩水)가 청천강이 아니라 중국의 요동반도(현 中國遼寧省소재)에 있는 대양하의 상류인 서대하라 하였고  60년대  중반에 진행된 북한의 강선총, 누상총과 중국요동반도의 고분발굴을 통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발상지는 중국대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아일보 1980 12월 일자 신문에서 인용)

  ※. 위의 자료는   파주염씨 부산종친회 발행 "파주염씨 사적" 제2호에서 발췌 편집하였음.(2005년 3월 염명선.)

참고문헌 : 海東譯史(해동역사)편
'按後韓(漢)書建武中韓廉斯人蘇馬諟來獻光武封爲廉斯邑君則廉斯本邑名而爲氏也集韻云測角切人名王莽時有'
 '후한서를 상고하면 건무중(서기25~55년)에 한의 염사 사람 소마시가 래헌하니 광무(서기24년)가 염사읍의 군에 봉하고 염사는 본래 읍명 이었는데 이로 성을 삼았다'


  여러 학자들이 '염사치'에 대한 연구가 오늘날도 계속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성과 이름이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는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복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염사치와 관련하여 '변한포' 얘기가 처음 등장하였다하여 이것도 연구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으로 보임. 아래에 이에 대한 글이 있어 연구하는 분들께 참고가 되게 하고자 인용합니다.

 


http://www.viva21.com/yoons/data/yoonhis.htm에서 퍼온글

성씨와 족보

세계 최초로 성씨(姓氏)를 사용한 나라는 문자(漢字)를 발명한 중국(中國)이 처음이며 당시 제왕들이 신하(臣下) 및 여러 부족(部族)을 통솔키 위한 수단으로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村名)이나 인근의 산(山),강(江),나무(木) 등 자연대상(自然對相)을 성(姓)으로 삼아 호칭하였다.이를 예로 보면,

 

강수(姜水)에 살던 신농(神農)의 어머니가 강 이름을 따라 강씨(姜氏)라 하였고,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 부근에 살았으므로 그 성(姓)을 희씨(姬氏)로,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그 성(姓)를 요씨(姚氏)라고 불렀다.

 

따라서 모든 성씨(姓氏)는 중국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조선 (古朝鮮)시대부터 왕실(王室)과 일부 대신(大臣)들이 성(姓)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씨족구별 및 부족통솔자의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특히 고려(高麗)중엽 이후부터 일반서민들도 성씨(姓氏)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문종 (文宗)이후 선계(先系)를 자세히 밝혀야만 과거(科擧)에 응시,벼슬할 수 있는 제도 때문이었다.아울러 우리 국민 모두가 성(姓)을 갖게 된 시기(時期)를 조선(朝鮮)중엽 이후로 보는 것이 현재 국내 통설(通說)이다.

 

---- 중 략 ---

 

周의 종법>B.C.12세기경 천하를 통일한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본국 영토는 자신의 직할지(直轄地)로 하고 새로 얻은 영토에는 그의 자제(子弟),동족(同族),공신(功臣)을 제후(諸侯)로 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이것이 바로 주(周)의 봉건제도인데,혈연관계에 기초를 둔 통치방법이었다.따라서 왕과 제후의 관계는 군신(君臣) 관계라기 보다는 오히려 본가(本家)와 분가(分家)의 관계였고,왕은 씨족장(氏族長),가족장(家族長)으로서 봉건제후들을 지배하였던 것이다.또한 적자상속제(嫡子相續制)를 확립,장자(長子)만이 가독권(家督權)을 가지고 나머지 차자(次子)들은 분가(分家)하도록 하였다.이 결과,씨족(氏族)을 표시하는 성(姓)이 갈라져 씨(氏)가 생기고 다시 씨(氏)가 갈라져 족(族)이 생겨 그 혈연적 유대관계는 엷어져만 갔다.이 엷어져 가는 혈연관계를 다시 강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종법(宗法)이다.이 종법(宗法)은 동일혈연자(同一血緣者) 사이에 百世에 이르도록 존속하면서 동족(同族)을 거느리는 대종(大宗)과 5世까지의 자손(子孫)을 다스리는 소종(小宗)을 세워,이들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에게 강력한 권위를 주어 동족(同族)을 통제케 하였다.또 제사(祭祀),상복(喪服),상호부조(相互扶助)에 관한 규약을 정한 것으로 당시 국왕(國王)과 제후(諸侯)를 제외한 나머지 치자(治者)계급사이에 행해진 규범으로서 고조선(古朝鮮)이하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 성씨>기자(箕子)조선이 건국되면서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되고 위씨(衛滿)조선 때에 이르러 그 풍습들이 본격적으로 전해지면서 당시 국왕(國王)과 중앙의 대신(大臣 : 각 촌장)들이 자신의 신분과 부족을 표시하기 위하여 점차 성(姓)을 사용하게 되었다.이는 고대 씨족사회가 점점 분화되어 소수부족 지배사회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타 씨족과의 구별은 필연적이었으며 이러한 호칭이 대대로 세습됨에 따라 자연스레 그들의 성씨로 정착하게 되었다.위만조선 말엽(기원전128년)에 압록강 중류지방에 있던 멸군(滅君) 남 려(南閭)가 28만구를 인솔하고 위만조선의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한(漢)나라에 귀속을 청했다...하여 그 성(南)을 나타내고 있으며 위씨 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 때의 대신이던 성 기(成己),로 인(路人),한 음(韓陰),삼(參)과 장군(將軍)이던 왕 겹의 이름도 보인다.또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전(漢傳)에 인용된 위약(魏略)을 보면 중국 왕 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 지황년간(地皇年間 :서기20~23년)에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가...운운하여 성과 이름을 동시에 적고 있고 서기 30년 낙랑군(樂浪郡) 토호(土豪) 왕 조(王調)가 한인태수 유 헌(劉憲)을 죽이고...하는 데서는 처음으로 토착인의 성명을 밝히고 있다.이는 우리나라 성씨의 사용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것이다.또한 부여(夫餘)에서는 선비족(鮮卑族) 모용외(慕容畏)의 침략을 받아 국왕 의노(依盧)가 자살하였고 다시 모용황의 침입으로 국왕(國王)인 현(玄)과 함께 5만명이 포로로 잡혀 갔다...에서 당시국왕을 현(玄)으로 표시했는데 이것이 성씨(姓氏)였는지는 고증할 길이 없으나 다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姓)으로 삼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 이하 생락 ----

 


다음 또 한 편의 글 소개

제56회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 발표요지(2000.9.30)
李富五(고양종합고등학교)

 
1세기초 廉斯國의 대외교섭

1. 머리말

삼한 지역에는 원래 78개 이상의 소국이 분립되어 있었다. 그 主帥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국 내의 각 집단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외부 세력에 대해서도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는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측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소국은 소국간의 경쟁에서도 앞섰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部族同盟說과 部族聯盟說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주로 부족간의 결속 자체를 강조한 것이었다. 이후 小國聯盟說이 등장하면서 맹주국의 역할이 부각되는 한편, 소국연맹의 유형별.단계별 차이점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영역지배가 실현되기 이전 소국간의 관계를 부각시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변화과정을 살피는 데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사료의 부족에 기인하지만, 소국간의 관계가 주로 {三國史記}에서 강조된 百濟國, 斯盧國, 金官國 등을 중심으로 검토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국 형성기 이후 다양한 입장에서 이루어진 소국의 대외교섭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자료는 극히 드물지만, 다음 사료는 후대에 부각되지 않은 소국의 대외교섭을 비교적 상세히 전하는 사례로서 주목된다.

가){魏略}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A)王莽 地皇時에 이르러 廉斯가 ①辰韓 右渠帥가 되었는데, (B)樂浪의 토지가 좋아 인민이 풍요롭고 즐겁게 삶을 듣고서 도망해 來降해 오려 했다. (C)자기 읍락을 나온 후 밭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 언어가 韓人이 아니었다. 그에게 물으니 남자가 말했다. "우리는 漢人으로 나는 戶來라고 한다. 우리 1500人은 재목을 벌채하다가 ②韓의 공격을 당해 붙잡혀 모두 머리카락을 잘리우고 奴가 된 지 3년이 되었다." 廉斯는 말했다. "나는 漢 樂浪에 항복하려 하는데 너도 가겠는가?" 호래가 말했다. "그러겠다." 이에 廉斯가 戶來를 데리고 출발해 含資縣에 이르렀다. (D)縣이 郡에 말하니 郡은 廉斯를 통역으로 삼아 芩中에서 큰 배를 타고 ③辰韓으로 들어가 戶來와 같이 항복한 무리들을 맞이하여 1000인을 얻을 수 있었다. 나머지 500인은 이미 죽은 뒤였다. 이에 廉斯가 ④辰韓에 일러 말했다. "너희는 500인을 돌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萬兵을 보내 배에 태우고서 너희를 공격해 올 것이다." ⑤辰韓이 말했다. "그 500인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는 대속할 것으로 내겠다." 이에 ⑥辰韓의 15000人과 弁韓布 15000필을 내었다. (E)염사치는 이를 받아 바로 돌아오니, 郡은 그의 功義를 기려 冠 과 田宅을 하사했다. (F)그 자손이 몇 대를 거친 뒤, 이로 인해 安帝 延光4년에 復除를 받았다({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

위 사료는 地皇時(20-22) 廉斯가 낙랑군에 歸附하는 과정을 전하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 이는 辰韓 내 弁韓의 형성 혹은 교역 전문집단의 출현이라는 측면에서 검토된 바 있다. 이외에도 단편적인 언급은 수 없이 이루어졌으나, 개별 소국의 대외교섭이라는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접근한 사례는 찾아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발표자는 위 사료에서 廉斯의 활동이 낙랑군 및 진한에 대한 교섭과 밀접히 연관된 점에 주목하였다. 이는 廉斯國의 대외교섭을 진한지역의 내부상황이나 낙랑군과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설명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발표자는 위 사료를 중심으로 1세기초경 염사국의 대외교섭을 검토하려 한다. 이를 통해서 진한 소국간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에 대해 한 단면을 밝히려는 것이다.

2. 廉斯의 樂浪郡 歸附 배경

廉斯는 낙랑군에 귀부하기 전에 辰韓 右渠帥가 되었다고 한다(가-A). 이는 廉斯의 귀부가 진한 우거수의 지위를 유지하는 문제와 연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본 장에서는 진한 우거수의 의미가 무엇이며, 여기에 생긴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밝히려 한다. 이를 통해 1세기초경 염사국의 대외교섭이 확대되는 배경을 파악하려 한다.
辰韓 右渠帥의 의미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右渠帥의 쓰임이다. '右'가 공간적 위치를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세력이 강했음을 표현한 것인지에 따라 진한 우거수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右'가 낙랑군의 입장에서 진한의 오른쪽을 의미한다면, 廉斯의 근거지는 진한의 서쪽에 위치한 셈이다. 그런데 당시 진한의 서쪽에는 弁韓이 존재했으므로(가-D), 이 경우의 廉斯는 진한 우거수보다 변한 거수로 기록되어야 자연스럽다. 이를 고려하여 '右'를 진한 내의 서부지역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의 '右渠帥'가 존재했다면, 이는 '左渠帥'의 존재를 전제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존재는 확인되지 않으며, 당시 낙랑군이 左.右渠帥의 구분을 중시할 이유도 찾기 어렵다. 이에 진한 우거수의 '右'가 공간적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右'가 우세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경우를 상정해 보자. 사료 가)는 漢代에 韓이 낙랑군에 屬해 朝謁한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첨가된 주석이다. 그렇다면 廉斯를 굳이 右渠帥로 표현한 것은 진한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춘 거수가 귀부해 왔음을 강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에 '辰韓 右渠帥'는 廉斯가 귀부하기 이전의 어느 시점에 진한 내의 유력한 거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渠帥'는 읍락 단위의 干(村長)보다는 國邑 主帥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 辰韓의 右渠帥였다면, 진한의 실체가 어떠했는지 궁금해진다. 辰韓이라는 명칭은 이미 소국 형성기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辰韓에는 처음에 6국이 있었으며 이 명칭이 韓에 들어온 秦人들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 소국들의 건국을 반드시 秦人들이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6국이 형성된 지역이 소국 형성기에도 辰韓으로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그렇더라도 '진한 6국'은 하나의 결속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일정한 지역의 小國群을 가리키는지 문제가 될 수 있다.
일단 초기의 진한 6국은 기원전 1세기-기원전후의 유물이 집중 분포하는 상주, 대구, 경산, 영천, 경주 등지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선에 서북한 지역으로부터 수입된 靑銅 威勢品들이 두드러지게 부장된 점으로 볼 때, 이 소국들은 '남한강유역-소백산맥' 방면을 통해 서북한 지역과 교역했을 것이다. 또 馬韓王이 원래 辰.卞韓을 '屬國'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보듯이, 이 과정은 한강유역 세력집단을 매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소국간에 일정한 협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그 대상에 변한까지 포함된 점으로 보아 진한만이 특정 소국에 의해 주도되는 연맹체를 결성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초기의 '진한 6국'은 유이민의 주도로 성립된 小國群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이는 단일한 연맹체를 이룬 후대의 辰韓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다만 이들은 서북한 지역과의 교역을 위해 대등한 입장에서 상호 협조한 것이다.
그러나 地皇時에 확인되는 辰韓은(사료 가) 이와 차이를 보이며 쓰임도 일정하지 않다. 첫째, 廉斯와 낙랑인들이 큰 배를 타고 들어갔다는 辰韓은(③) 넓은 의미에서는 漢人 1500인이 억류되었던 지역을 전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는 漢人 1500인을 공격하는 데 참여했던 韓의 경우에도(②) 마찬가지이다. 죽은 漢人들을 대신해 낙랑군에게 제공되었다는 辰韓 15000인도(⑥) 특정 소국인만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상의 辰韓은 공통의 사안을 매개로 서로 결속한 소국들을 포괄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둘째, 억류된 漢人들의 문제로 廉斯와 협상했던 辰韓은(④,⑤) 위 소국들의 중심 소국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1세기초경의 진한지역에서는 중심 소국이 부각되면서 이를 매개로 다수 소국이 결속되어 있었다. 이에 辰韓은 중심 소국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 統制圈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심 소국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혁거세 38년경 진한은 변한과 구분되는 세력권으로 등장하며, 전체 진한의 대외교섭에 대한 책임이 사로국왕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는 사로국이 점차 위 진한 소국의 대외교섭을 주도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1세기초경 중심 소국으로서의 진한은 사로국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그렇더라도 염사국과 사로국의 관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진한 우거수'는 사로국 중심의 통제권 하에서 부각된 주수일 수도 있으나, 반대의 경우도 무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는가에 따라 염사국의 대외교섭도 결정적으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염사국의 위치 비정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비정이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廉斯는 육로를 통해 낙랑으로 북상하는 도중에 漢人 戶來를 만났는데, 그는 辰韓에 의해 강제노역을 당하고 있었다. 당시 진한의 중심은 사로국이었으므로, 호래가 억류되었던 곳은 경주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廉斯가 출발한 곳은 이보다는 남쪽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진한지역이 대체로 낙동강 이동인 점을 고려할 때, 염사국은 낙동강 하류 동안지역의 어느 곳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역의 廉斯가 사로국의 통제권 내에서 右渠帥가 되었다면, 그가 굳이 이로부터 이탈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또 사료 가)에서 진한 소국은(②,③,⑥) 염사국과 별개의 세력권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염사국은 사로국의 통제권과 별개의 세력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낙동강 이동지역을 광의의 진한지역으로 볼 수 있다면, 염사국은 이 범위 내에 위치하면서도 사로국 중심의 진한과는 별개의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면 염사국이 이러한 위치에 오른 계기는 무엇일까? 이를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사료는 없다. 다만 廉斯가 漢語에 능통했던 점으로 볼 때, 우거수의 위치는 중국상인들과의 교역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대외교역에서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경산 임당 E-132호, 임당 저습지, 의창 다호리 1호 등의 五銖錢이 주목된다. 이는 변.진한지역에서 생산된 布나 철소재 등의 대가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그 만큼 낙랑군과의 교역은 실용품을 중심으로 확대된 것이다. 또 樂浪郡은 목재를 벌채하다 억류된 漢人 1500명에 대해 3년간이나 별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漢人들의 벌목활동이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낙랑군을 통해 진출한 內郡賈人이 이러한 활동을 주도했을 것이다. 이처럼 중량이 큰 물품은 육로보다는 연안항로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낙랑군과의 교역은 위세품의 차원을 넘어 실용품을 중심으로 확대되는 동시에 해로 운송의 비중이 확대되었다. 염사국이 부각된 것도 이러한 교역에서 주변 소국을 주도한 데 기반을 두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대외교역의 확대는 수입품의 대가로서 지불될 생산물의 증가를 전제로 했을 것이다. 우거수의 부각은 이러한 물품에 대한 유통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철기 보급의 변화상이 주목된다. 기원전후부터 기존의 청동제 무기는 거의 철제무기로 전환되었으며, 鐵劍과 鐵矛의 보급이 확대되고 環頭刀, 鐵鏃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板狀鐵斧의 보급이 확대되는 한편, 鍛造鐵斧, 鐵鎌, 따비, 刀子 등 새로운 단조제품 농기구가 출현하였다. 이를 보유한 계층도 주수층 아래의 하위집단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는 읍락지역에서도 유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기의 유통은 소국 주수의 지배력 유지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그 보급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각 소국이 상호 협조할 필요성도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낙동강하류 동안지역에서는 1세기경의 철생산 흔적이 보고되지 않았고, 주거지나 목관묘의 철기 조사도 극히 미미하다. 부산 구서동의 단조철부와 밀양 내이동의 철부 정도가 알려졌을 뿐이다. 이를 가지고 철제품 유통의 상황을 파악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부산 萊城 유적에서 기원전 2세기경의 철생산 흔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철기 완제품의 생산은 대체로 개별 소국을 단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한 철소재의 상당부분은 양산 물금 등 노천철광이 소재한 곳의 철광석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다. 염사국이 중국상인들과의 교역을 주도한 것은 이러한 제품의 유통을 주도한 데에 기반을 두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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