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우거수(辰韓右渠帥) 염사치(廉斯鑡)의 사화(史話)
삼한 주위 토착사회(三韓周圍土着社會)의 거수(渠帥)로써 한(漢)의 문물을 흠모하여 그 군현(郡縣)에 자진하여 투항하는 자도 있었으니 유명한 진한우거수 염사치(廉斯鑡)의 낙랑귀화(樂浪歸化)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염사치에 관한 사화(史話)는 위의 위지기사(魏志記事)에 대한 배송지 주(裵松之 註)에 인용된 위략(魏略)에 자세히 나타난다.
.王莽(왕방) 지황년간(地皇年間) 서기 20~23년에 염사치가 진한우거수(右邊渠帥)로 있을 때 낙랑의 토지가 기름지고 인민이 다 잘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투항(歸化)하려 하여 자기의 읍락(邑落)을탈출(脫出), 순망중(巡亡中), 밭 가운데 새(雀)를 쫓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용어가 한인과 다르므로 이유(理由)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되, "우리는 본래 한인인데, 나의 이름은 호래(戶來)라 한다. 우리들 1천5백인이 재목을 벌채하다가 한인에게 잡히어 머리를 깍고 종(奴隸)이 된지 3년이 된다" 라고 하였다.
'치(鑡)'가 이르되 내가 지금 낙랑에 투항하러 가는 중이니 너도 같이 가지 아니 하려느냐?하매 호래는 좋다고 하였다. 호래를 데리고 낙랑 함자현(合資縣)에 이르러 사유(事由)를 말하니, 현에서는 곧 '치'를 통역(使譯)으로 삼아 금중(芩中)에서 대선(大船)을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와 호래의 항반배(降伴輩)를 내 놓아라 하여 생존자(生存者), 1천인을 얻었으나, 나머 것 5백인은 이미 죽었다. '치'가 진한(당국자)에게 이르기를 "네가 그 5백인을 마져 돌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에서 만병(萬兵)을 보내어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칠 것이다. 진한(당국자)는 가로되 "5백인은 이미 죽었으나 그 대신 배상을 물겠다하고 진한인 만5천인과 변한포(弁韓布) 만5천필을 내 놓았다. '치'는 그것을 가지고 낙랑으로 갔다. 군(郡)에서는'치'의 공적을 표창하여 관책(冠幘)과 전택(田宅)을 주고 자손(子孫)이 수대 계승(數代 繼承)하여 안제연충4년(安帝延忠四年 서기125년)에 이르도록 부세(賦稅)의 면제(免除)를 받았다.
위지 위략 원문(魏志 魏略 原文)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言非韓人 問之, 男子曰 :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 韓戶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鑡曰 : "我當降 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 ... "可..
(辰) 鑡因將 戶來 (來) 出詣 含資縣, 縣言郡, 郡 卽以 鑡爲譯, 從芩中 乘大船入 辰韓, 逆取 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鑡 時曉謂 辰韓 : "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 : "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表<鑡>功義,
賜冠幘, ·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三國志 魏書 東夷傅 第30 213쪽)
이 염사치의 사화(史話)는 앞에서 말한 동이인 한민족(東夷人 韓民族)은 동성불혼(同姓不婚) 하였다는 기사(記事) 바로 밑에 나오는 설화(說話)로써 염사인이 비록 지명(地名)이라 하더라도 연세대 정법대학 김주수 박사설(金疇洙 博士說) 같이 지명(地名)에 따른 성씨(姓氏)가 된 증거이며 또 김주수교수의 친족상속법 356쪽 "성과 본"을 원용(援用)하면 삼한시대 신지(臣智)와 거지(巨智)라는 특수한 동이군장(東夷君長) 혹 대인 칭호(大人稱號)가 원인(原因)이 되어 염(廉)이라고 불렀다(廉之號)와 서로 관계있는 개념(槪念)으로 성씨(姓氏)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사화중(史話中)에 나타난 인수, 포수(人數 布數)에 대하여는 그것이 얼마만큼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지 자못 의심스러우나 기타는 인명, 지명, 연대 등 구체적인 기사가 보이므로 대체로 사실에 가까운 사화(史話)라 할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 먼저
주의 할것은 "우거수"니 "염사치" 니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른바 진한은 전체사실을 통하여 보면 글자 그대로의 진(辰)의
객체인 한(辰韓)의 위(謂)가 아니라 진(辰)의 주체(主體)요. 한(韓)의 맹주격(盟主格)인 고한(高韓'辰')과 혼동(混同)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고 우거수(右渠帥)는 우변거수(首長) 뜻. 염사는 진한, 마한 50여국 가운데 나타나지 아니한 국읍(國邑)의 이름으로 지금의 서산시 해미(海美)인둣 하고 '치'는 순정히 인명이라기 보다 우리나라의 우두머 리 수장(首長)의 사음(寫音)인 지,우,차(智 友 借)와 같은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치'가 호래(戶來)를 만난 지점은 어디인지
알수 없으나 위 읍락(邑落)인 염사에서는 좀 떨어진 곳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 함자현(含資縣)은 이미 낙랑(樂浪)의 한 속현(屬縣)으로 지금 황해도 서흥(黃海道 瑞興) 부근에 해당하니 염사가 이곳에 와서 사유를 말한것은 함자현이 정히 정히 낙랑군청방면에 통하는 안충(安衝)에 해당하였던 까닭이다. '치'로써 사역(使譯)을 삼는 것은 그가 진인(辰人)으로 진의 지리에 밝고 또 한어(漢語)에 통하였던 때문이다. 그가 낙랑의 사명(使命)을 받들고 대선(大船)을 타고 온것은 다수(多數)란
호래의 항반배(降伴輩)를 역취(逆取)해올 준비(準備)로써 황해와 같은 대해(大海)를 항로(船路)로 취한 소이(所以)였을 것이다.
교섭의 대상자인 소위 진한은 즉 진의 최고맹주국 마한(最高盟主國 馬韓의)인 목지국(目支國 - 지금 직산부근)을 이름이니, '치'는 지금 황해도 일각에서 대선을 타고 아산만으로 들어와 상륙한 것이라 하겠다.
배상물(賠償物) 가운데의 모한포(牟韓布)는 변한포(弁韓布)의 오(誤)로 볼 것이나 그 수량에 대하여는 인수와 같이 의문으로 여기는 바이다. 위의 사화에서 시사(示唆)되는 바는 당시 낙랑방면의 한인이 목재를 채벌 하기 위하여 주위토착사회(周圍土着社會)의 지대에 까지 침입(侵入)한 것과 그때 진(辰)의 법속(法俗)이 외국포로(外國捕虜)를 노예로
삼되, 머리를 깍아 유포케 하였음과 또 진인(辰人)으로서 낙랑방면의 경제 생활과 문화생활을 흠모하여 투항하는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치'가 선례(先例)를 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그 후 얼마 아니하여 염사인의 낙랑에 조알(朝謁) 조공(朝貢)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光武帝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 蘇馬諟等詣樂浪, 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광무제 건무 20년(서기 44년)은 왕망(王莽)의 지황년간(地皇年間)에서 20여년후 밖에 되지 않고 소마시(蘇馬諟)는 역시 염사부락의 주사(主帥)였으며 "위한염사읍군, 사속, 낙랑군(爲漠廉斯邑郡 使屬 樂浪君)"은 소위 조알(朝謁)과 조공(朝貢)에 대한 한의 의례적(儀體的)인 봉작(封爵)과 형식적인 부용관계(附庸關係)를 말한 것에 불과하다.
후한서 광무제기(光武帝紀) 같은 해 건무 20 년 조(條)에 "秋 東夷 韓國人 率象 謁樂浪 內附(추 동이 한국인 율상 알낙랑)" "가을에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 임금을 궁전에서 만나뵙고 들어와 붙었다." 한것도 위의 소마시 등의 조알(朝謁)을 자칭한 것임을 더 말할 것 도 없다. 생각컨데 소마시는 낙랑에 귀화한 염사치에 대신하여 그 후임자자로서 (主帥)가 되었던바 그도 역시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 ; 그 전날 중국의 강한 세력에 따르고 복종하여 안전을 유의하려던 사상과 허영주의자(虛榮主義者) : 허영에 들뜬 자가 되어 소위 조알(朝謁)의 예를 닦고 한으로부터 읍군(邑君)의 봉작(封爵)을 받았던 모양이다. 진한 양한과 한군현과의 교섭 관계가 빈번했듯이 변진인(弁辰人)과 왜인(倭人 : 일본인)과의 왕래 교통도 일찍부터 열리고 잦았음은
지리 상 자명한 이세(理勢)라 하겠다. 이상은
이병도 박사의 설명이다.
참고로 말할 것은 1982년부터 대한민국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가 내용을 바꾸어 나오게 되었다. 다음의 논설(論說)에 앞서 참고하기
위하여 인용한다.
백제의 발전 : 한편 백제는 그
국력을 크게 뻗쳐
4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진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요서 지방을 점령하고, 이어서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큐우슈우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이처럼 백제인은 요서지방, 큐우슈우지방, 그리고 본국을 연결하는 활동무대를 확보하여 활발하게
해외 진출을하였다.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요서지방(遼西地方)이라 함은 중국 요하(遼河) 서쪽 일대의 지역을 모두 이르는 말로, 1954 년
요동성(療東省)의 대부분과 합쳐 요령성(遼寧省)이 되었음. 성도(省都)는 금주시(錦州市) 이다. 민족사학자 이시며 문학박사이신 고 최동(崔棟) 선섕의 저서,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224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염사치사화의 진한은 요동반도에 래도(來到) 하였다가 조선인관리에게 발각되어 3년간이나 피금(被擒) 된 것이 었다.
위의 염사읍은 현재의 여순지방(旅順地方) 인둣하다. 여순의 발음이 고대(古代) 염스(廉斯)에서 유래할 수도 있고, 또 지리적으로도 부합된다. '치'는 두목의 의미인둣하다. 당시 한의 낙랑군치소(樂浪郡治所)는 소위 낙랑현(樂浪縣)이라는 곳이며, 소위 서부 낙랑군의 평양(平壤)(襄平) 이었으니 대능하하류(大凌河下流) 동쪽 해안지대였고 함자의 소능하하구(小凌河下口)의 소위 "대수서지...함자입해(帶水西至 含資入海)"의 함자현이 었으니 대수(帶水)가 소능하이었으므로 함자는 소능하의 하구의 해안도시였다. 또 낙랑군의 관리가 승선한 금중(芩中) 이었다고 하면 금중은 대능하구 지방의 대삼각주 부근의 려초(廬草)가 무성한 어촌인 듯 하다.
금(芩)은 일본 서천씨에 의하면 염분이 있는 습지에 무성하게 자라는 수초라 한다. 요컨데 낙랑군의 치소와 함자현이 멀지 않은 지점에 있었고 또 함자, 금중이 진한의 대안지(對岸地) 이 었다는 점은 대능하구(大凌河ㅁ)의 대안지
요동반도를 의미 한 것이다. 만일 이 삽화(揷話)에 관한 진한을 조선반도 남단 동방으로 착각할 때에는 거의 만리나 해안선을 우회하는 일종의 넌센스의 희극이 발생한다. 같은 책 677페이지에 한인, 염사읍군은 동이 한국인이라 하니 일견 조선반도내에서 발생한 사건 (事件) 같으나 실제로는 조선반도내가 아니라 요동반도내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특히 염사읍은 조선반도내에서는 미문(未聞)의 읍명이로되 당시부터 약 20년전, 왕망지황년간(서기 22년)에 진한지의 염사읍인 '치'가 진한인으로써 한락랑군엣 투항할 의사 운운의 기사가 있으나 그 동일한 염사읍은 요동 반도내의 진한의 구명(舊名)을 가졌던 염사읍거수 이었으며 요동반도가 「古代의 辰韓」의 남방이었던 것이 분명하고 또 그 당시 한낙랑군에서 사실상 이탈 제외된 예인(穢人)의 자치국 으로서의 고구려에 내속하였던 고로 염사읍군의 '치'라는 자가 인방(隣方)의 한의 낙랑군에 투항을 자원하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기왕에 평양과 또 요동반도 남단까지 남하 진출하였으니 동이인이 한인도 되고 또 예인으로 기재되지 아니하고 한인이라고 하였으니 초학자(初學者)에게는 혹 조선반도내의 한국인으로 착각하기 용이 하다. 그러나 사실은 요동반도의 조선인을 지칭한 것이며, 이를 계기로 기억 할것은 금후 즉 후한 및 위(魏) 시대의 한인(韓人)에 관한 기사는 대부분 요동반도의 한국인 즉, 예인을 언급한 것이었다. 전기의 한인 염사, 소마시에 관하여 한인을 진한인으로 의(擬)함은 가당하거니와 충청도지방을 진한지로 비정(比定) 함은 오해이다. 그것은 한(漢書)에 진국과 진한을 구별 못함에 기인한 착각이며 당시의 진한은 요동반도이 다.
북한 "사회 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발간된 「조선천사」를 통해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친살수(薩水)가 청천강이 아니라 중국의 요동반도(현 中國遼寧省소재)에 있는 대양하의 상류인 서대하라 하였고 60년대 중반에
진행된 북한의 강선총, 누상총과 중국요동반도의 고분발굴을 통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발상지는 중국대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아일보 1980 12월 일자 신문에서 인용)
※. 위의 자료는 파주염씨 부산종친회 발행 "파주염씨 사적" 제2호에서 발췌 편집하였음.(2005년 3월 염명선.)
참고문헌
: 海東譯史(해동역사)편 '按後韓(漢)書建武中韓廉斯人蘇馬諟來獻光武封爲廉斯邑君則廉斯本邑名而爲氏也鑡集韻云測角切人名王莽時有' '후한서를 상고하면 건무중(서기25~55년)에 한의 염사 사람 소마시가 래헌하니 광무(서기24년)가 염사읍의 군에
봉하고 염사는 본래 읍명 이었는데 이로 성을 삼았다'
여러 학자들이 '염사치'에 대한 연구가 오늘날도 계속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성과 이름이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는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복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염사치와 관련하여 '변한포' 얘기가 처음 등장하였다하여 이것도 연구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으로 보임. 아래에 이에 대한 글이 있어 연구하는 분들께 참고가 되게 하고자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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