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염돈소(廉敦紹)
1986년판 대동보 및 문헌록 어디에도 자료가 없는 분이나,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어 안내하오니, 앞으로 계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2005년 3월 염명선)
고려국 승봉랑 총부산랑 사 비어대 증삼중공광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 기공 행장(高麗國承奉郞摠部散郞賜緋魚袋贈三重公匡僉議政丞判典理司事上護軍奇公行狀 : 이 행장은 기황후의 아버지인 영안왕 기자오의 행장으로, 한산이씨의 시조이며 목은 이색의 아버지인 가정 이곡이 지은 것으로 가정집에 수록되어 있음.)
이곡(李穀) 稼亭先生文集卷之十二 行狀
중략 - 長男軾。先公歿。次轍。以僉議政丞。今封德城府院君。次轅。以僉議贊成事。今封德陽君。次輈。大匡元尹。次輪。右常侍。長女適商議評理趙希忠。次適典儀令廉敦紹。孫男凡十一。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邇漙化。以軍簿摠郞宿衞闕庭。次天驥,有傑,田龍。皆郞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公之家世功德。載在國史。公之事業焯焯。在人耳目。今掇其大槪爲行狀。以備釆擇焉。至正▣▣八月初一日。謹狀
맏이 식(軾)은 공보다 앞서 죽고, 둘째 철(轍)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서 지금 덕성부원군에 봉하여 있으시고, 셋째 원(轅)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지금 덕양군(德陽君)에 봉하여 있으시며, 넷째 주(輈)는 대광원윤(大匡元尹)이시고, 다섯째 윤(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장녀는 상의평리(商議評理) 조희충(趙希忠)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전의령(典義令) 염돈소(廉敦紹)에게 시집갔다. 남자 손자는 모두 열하나인데, 맏손자의 이름은 천린(天麟)이고, 아명은 완택보화(完澤普化)이며,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 들어가 임금을 모셨고, 다음 천기(天驥)ㆍ유걸(有傑)ㆍ전룡(田龍)은 모두 낭장(郞將)이요, 나머지는 아직 벼슬하지 못했다. 손녀는 일곱인데, 맏이는 홍복 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집안 대대의 공덕은 국사에 실려 있고, 공의 사업은 빛나서 사람의 눈과 귀에 알려져 있지만, 이제 그 대강을 모아 행장(行狀)으로 삼아서 채택할 것에 대비하였다. 지정(至正) □ 8월 초하룻날 삼가 행장을 씀.
참고 : 행주기씨 문중 자료를 인용하면, 염돈소를 "서원인 파주령"이라 하고,
염돈소 처의 언니인 조희충의 처는 공주의 위세를 부린 것으로 보아 염돈소의 처도 같은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다음의 설명을 보면 이해가 되리라 봄.
기자오가 영안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원나라 정부내에서 공민왕과 영앙왕의 지위는 명목상 동일했다. 원은 자주 사신을 보내 기황후의 어머니 삼한국태부인 이씨를 예우했는데, 공민왕 역시 대우를 극진히 했다. 공민왕은 특히 연초면 이씨를 방문했으며, 원사(元使)들이 베푸는 향연에도 빠지지 않았다. 기황후의 생일에는 전례 없이 사신을 원에 파견했다. 1355년 8월에 열린 향연에서의 자리배치를 보면, 공민왕과 이씨(李氏)는 모두 남면(南面)하고 황후의 언니 조희충(趙希忠)의 처는 동(東)에 앉고 기철과 원사(元使)는 서(西)에 앉고 재추(宰樞)는 계상(階上)에 앉았다. 공민왕과 이씨는 동
황태자에 책봉되어 고려를 방문하여 외할머니에께 인사할 때 축하하여 베푼 향연에서는 노국(魯國)공주와 만만(巒巒)태자는 남면(南面)하고 공민왕은 서(西)쪽에 앉고 이씨(李氏)는 동(東)쪽에 앉았는데, 공민왕이 술을 부어 먼저 무릎을 꿇고 황태자에게 드리니 황태자가 서서 마시고 황태자가 술을 부어 외할머니 이씨(李氏)에게 드리고 다음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에게 드렸다.
또 1330년대의 고려사에 이런 내용도 있음.
(충혜왕대) 기철(奇轍)의 매부인 염돈소(廉敦紹)의 노(奴)의 일당 5-6명이 공모하여 남의 유부녀를 왕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강제로 데려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