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항일독립 투쟁을 하는데 그 실상의 전체를 바르게 종합한 기록이 각각이고 또 그 평가의 시각도 여러 가지라 수용하기가 어려운 실정인데 우리 염문에서의 투쟁 인사들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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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공(秋汀公)
염온동 행적(1898. 5. 1~1945. 1.24) 염온동(廉溫東:24세)
호 : 추정공(秋汀公)
1898. 5. 1일
강원도 금화에서 출생하시어 1946. 1.24일 해방 다음
해에 돌아가심.18세 당시부터 독립운동자들과 교유하여 비밀결사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는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1921년 4월에는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전차감독(電車監督)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23년 4월에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해방되던 해인 1945년 3월까지 여러 차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7월에는 상해 3 1당에서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의 창립 총회가 열려 임시정부를 유지, 지원하기 위한 후원금을 확보하도록 하였는데, 위원장에는 안창호(安昌浩)가 선출되었으며, 그는 이유필(李裕弼)
임필은(任弼殷)과 함께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27년 3월에는 상해한인청년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9년에는 남경에서 민병길(閔丙吉) 윤기섭(尹琦燮) 성주식(成周寔) 신익희(申翼熙) 연병호(延秉昊) 최용덕(崔容德)
안재환(安載煥) 김홍일(金弘壹) 등과 함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조직하였다.
이 당의 목적은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꾀하는 것으로 동시에 산하에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여 무력 행동대로 삼았는데 그 단장에는 안재환(安載煥)이 선출되었으며,
중견 단원으로는 김창화(金昌華) 나월환(羅月煥) 이건호(李建浩) 이영희(李英熙) 최경수(崔景洙) 등이활동하고 기관지로 「우리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단원 훈련과 교양에 이바지하였다.
1932년에는 당원이 약 40명 가량으로 늘어 상해와 남경 등에서
계속 활동하였는데 그는 당의 중견 간부로서 활약하였으며, 같은 해에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1935년 11월까지
재직하였다.
1941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부관처 관리과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였으며, 1944년 6월 5일부터는
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겸 선전부 간사로 임명되었고, 동년 9월에는 군사위원회 간사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45년 3월부터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광복시까지 일생을 조국 광복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 독립운동수훈자료집]
독립운동가 염용수(1880. 7.27~1909 7.14) 전남 보성 출신이다. 1908년 3월 보성군 문덕면 출신 안규홍이 보성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또한 관북 출신 강성인이 의병을 이끌고 이에 합세하여 의진의 기세가 자못 떨칠 초기에 보성 의진에 입대하였다. 일선에서 호군하며 군사를 모집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후 보성군 '비둘기치' 전투와 문덕면의 '약가령이치'전투에 참전하였으며, 화순 운월치 등의 전투에 참전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 14일 보성군 복내면 장천리 평주리, 반곡 작전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다량의 무기를 노획한 후 복내면 헌병청을 습격하여 적병 수십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왜적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참고문헌 : 독립운동수훈자료집]
독립운동가 염규호(1881. 3.23~1941. 3. 9) 경기도
파주 출신이다. 1919년 3월 26일 김수덕.김선명 등과 함께 와석면 일대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미 와석면 일대는 임명애가 주동하여 3월 10일 교하리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구세군인 그는 3월 25일 김수덕.김선명.임명애와 함께 자기의 집에서 주민에게 3월 28일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테니 모두 동리 산으로 모이라는 격문의 원고를 작성하여 60여 매를 인쇄하였다. 이에 김선명.김창실과 나누어 가지고 구당리.당하리 일대의 주민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3월 26일에 7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여 면사무소로 가서 사무소 유리창을 깨뜨리고 면서기들에게도 휴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 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연락을 받고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 경찰의 발포로 최홍주가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시위 군중은 해산되었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 해 9월 29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참고문헌 : 독립운동수훈자료집]
독립운동가 염상오(1885.11.26~1919. 3.12) 충남 논산출신이다. 1919년 3월 12일 오후 3시반 강경 시민과 학생 1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논산 읍내로 행진하자, 논산 읍민이 합세하여 1천여 명의 시위대열이 이뤄져 그는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7,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수훈자료집]
독립운동가 염도철(미상~1921.11.13)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무장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을 무렵, 국내에서는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3.1운동을 통해 한민족은 평화적인 시위로서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으며,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하에 70여 개의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청산리 전투와 봉동 전투에서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이 두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밀린 독립군은 소련.연해주 등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시참변이후 독립군단체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와 항일전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염도철은 1921년 5월 이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같은 해 11월 13일 풍산군에 있는 경찰관 주재소에서 취조를 받던 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9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수훈자료집]
독립운동가
염성오 행적(1877. 2. 4~1947. 7.20)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이다.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선두리(船頭里)에 살면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참여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9일 유봉진(劉鳳鎭) 등이 주도하는 독립만세운동계획에 찬동하여 3월 18일을 거사일로 약정하고 동지규합과 사전준비에 참가하여
자택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3월 18일 강화읍내 장날에 모인 1만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일로 인하여 이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에 벌금 20원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월형이 확정되어 1년 2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만흥(1879 ~1928. 3.13) 경기도 안성 출신이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양성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운동은 유지 인사들인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이 주도하여 추진되었다. 거사 당일인 4월 1일 독립만세운동은 처음에는 원곡면과 양성면이 별도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염만흥은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이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고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 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경찰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 우체국으로 가서 그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하였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건조물 소훼.소요 등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참고문헌 : 독립운동수훈자료집]
독립운동가 염택눌(1850. 1.28 ~1929. 1.18) 함남 단천출신이다. 평소 일제의 국권 침탈에 통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던 그는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1920년 8월 함남 단천에서 대한독립군비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5명의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 13,350원의 출금계약을 하여 이를 단원인 김택률에게 전달하는 등 독립군 지원활동에 나섰다. 이어 그는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교통사무국의 함남 단천국지국에 가입하여 군자금 수합, 국내 정세의 파악,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등의 임무를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교통사무국은 연통제와 더불어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주요한 조직이었다. 이들 조직은 국내 각지와 통신 연락을 갖춤으로서 임시정부의 염향력이 국내에 미치도록 하고 임시정부와 국민간의 기맥을 통하게 하여 독립을 완수할 때까지 내외 국민의 활동을 일치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1919년 국내 각지에 설치되었다. 염택눌은 이와 같은 교통국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중 1921년 5월 교통사무국 함남 지국장인 조덕윤이 일경에 피체 됨으로써 45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200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수훈자료집]
독립운동가 염학모(1877 ~1921.12.17) 함남 단천 출신이다. 대한독립군비단에서 활동하였다. 염학모가 활동했던 대한독립군비단은 1919년 3월 만주 지역에서 3.1운동이 전개된 후 동년 5월경 함경남도 해산진 대안 장백현에서 함경남도 출신의 이희삼.이동백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1919년 11월 1일경 이 단체의 주요 간부는 단장 이태걸, 부단장 김동준, 총무장 김찬, 재무장 이동백, 경무부장 이광립, 참모장 서병호 등이었다. 염학모는 이 대한독립군비단에서 1920년 2월, 운동을 보다 활발히 전개하기 위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을 때 재무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인물로는 단장 이은향, 부장 이태걸, 군사부장 이동백, 재무부장 윤덕보, 참모부장 김찬, 경찰부장 정남섬, 문사부장 김종기, 외교부장 조훈, 소집부장 김정익, 공창부장 김진무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대한독립군비단에서는 지단 조직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19년 11월 1일 조직된 장백현 17도구의 장백지단이다. 아울러 국내에도 지단 조직을 확대하였는데, 그 조직망은 대개 중심 인물들의 원적지인 함경남도 지역이었다. 대표적인 지단으로는 함경도 단천지단과 북청지단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대한독립군비단에서 활발히 지단 활동을 전개할 때 염학모는 장백현 18도구 대정정동 상리 지단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이끄는 이 지단의 단원은 경찰원 18명, 통신원 15명 등이었으며, 무기 소지 상황은 권총 4정, 탄약 150발 등이었다. 한편 염학모는 임시정부와 연계해서도 일을 전개하였는데, 1921년 10월 함경남도 교통사무국 참사로서 활동하다가, 동년 12월 17일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수훈자료실]
독립운동가 염윤원(미상~1908.) 함남 단천출신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나아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염윤원은 1908년경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함남 단천에서 군사들을 규합하여 일본군과 수 차례의 전투에서 승전하며 활동하던 중 부친을 뵙기 위해 고향집에 들렀다가 피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옥문을 부수고 맨손으로 일병을 격살한 후 옥중의 의병들을 구출하고 일진회원인 친일 군수를 응징하다가 다시 피체되어 이튿날 바로 총살 순국하였다. 순국 정경을 기록한 당시 신문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그 이튿날 포살을 당할 새, 염공이 천연히 정색하며 하늘을 불러 왈 "오늘 너희가 오늘날 나의 육신은 죽이나 나의 철석 같은 정신은 못 죽일 것이요, 너희가 나의 한 몸은 죽이나 우리 일심으로 단결된 동포는 다 죽이지 못할지니 그리하면 너희 종자는 남지 않으리라."(중략) 오호라 슬프다. 염공의 의기는 더 말할 것 없거니와 일층 더 탄복할 일은 그 날 옥벽을 헐고 일병을 타살하였으니 어찌 후환이 있을 줄 모르리오마는 목숨을 도망치 않고 다시 옥중에 들어가 동포를 구제하다가 사로 잡힌 바 되었으니 그 근경을 생각하면 사람마다 기필하기 어려우며(중략)'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수훈자료집]
독립운동가 염석주(1895~1944.4) 염석주(錫柱)는 1895년 수원군 일형면 율전리 366(현재 성균관대학 근처)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수학한 인텔리로,
고향과 다름없는 안산 '막고지'(현재 사동)에서 거처하면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의 농촌 사업을 후원했다. 그는 만주 길림성에
60만평의 농장을 마련하여 독립군 제2지대(김창환 장군)에 군량미를 조달하며, 상해임시정부로 경비를 보내는 해외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염석주는 신간회 수원지역 책임자로 활동하고 여운형 등 동지들과 협력하며 국내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행적들은 현지에서 은밀히 내사를 해온 '오야마'란 고등계 형사에게 꼬리가 밟히고 1944년 4월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18일간의 모진
고문 끝에 통한의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신간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좌경으로 낙인 찍혀, 당시 생존한
분들은 공식 활동을 제약당하고, 순국한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가의 반열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독립운동가 염동규(廉東圭)(1873.11.25~1909. 8. 5) 전남 보성(寶城) 사람이다. 1908년 2월 전남 보성에서 안규홍(安圭洪) 의병장이 거의(擧義)하자 이에 참진(參陣)하여 보성군
조성(鳥城), 진산(眞山) 등지에서 수 차례 일본군과의 전투에 종군하다가 호곡(毫谷)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석하(廉錫河 1892~1919. 3.10) 함남 단천(端川)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단천읍내에서 천도교구장 염원형(廉元亨)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헌병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에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여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순도기념일(殉道紀念日)인 3월 10일을
기하여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각 면(面)에서 3백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교당에 모여서 먼저 교조 순도기념식을
거행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선두로 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염석하도 시위군중과 함께
천도교당을 출발하여 용현리(龍峴里)와 하서리(下西里)를 거쳐 헌병대로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군중은 점차 늘어 1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헌병대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신랄하게 규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시위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서봉화(徐鳳化)가 앞으로 나서며 헌병대장에게 우리나라를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헌병대장이 태극기를 든 서봉화의 어깨를 군도로 내리쳤다. 그러나 서봉화는 가슴을 풀어 헤치며 계속 항거하다가 결국 배를 찔려 순국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본 군중들은 분에 못 이겨 헌병대로 달려들어갔다. 이에 헌병들은 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았고, 이 과정에서 염석하는 헌병이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석한(廉錫漢 1890~1919. 3.10) 함남 단천(端川)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의 단천읍내에서 천도교구장 염원형(廉元亨)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순국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에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여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순도기념일(殉道紀念日)인 3월 10일을 기하여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각 면(面)에서 3백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교당에 모여서 먼저 교조 순도기념식을 거행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선두로 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염석한도 시위군중과 함께 천도교당을 출발하여
용현리(龍峴里)와 하서리(下西里)를 거쳐 헌병대로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군중은 점차 늘어 1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헌병대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신랄하게 규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시위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서봉화(徐鳳化)가 앞으로 나서며 헌병대장에게 우리나라를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헌병대장이 태극기를 든 서봉화의 어깨를
군도로 내리쳤다. 그러나 서봉화는 가슴을 풀어 헤치며 계속 항거하다가 결국 배를 찔려 순국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본 군중들은 분에 못 이겨
헌병대로 달려들어갔다. 이에 헌병들은 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았고, 이 과정에서 염석한은 헌병이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원모(廉元模 1901. 9.19~1969. 2.21)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1927년 3월 통영군 통영면 주민 박봉삼(朴奉杉) 외 11명은 경상남도 평의회(評議會) 평의원인
김기정(金淇正)이 회의 석상에서 「조선어 교육 불필요」, 「조선어 통역 철폐」 등의 친일매국적 주장을 한 사실을 알고서, 그를 규탄하는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집단으로 절교장을 보내는 한편 공직사퇴의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김기정이 이에 맞서 일제 검찰에 고소함으로써 박봉삼 등은
전원 통영경찰서에 구금되고 말았다. 이에 동년 5월 12일 면민 30여 명이 그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당국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경찰서로 몰려가서는 피구금자 면회를, 김기정의 집으로 몰려가서는 고소 취하를 요구했고, 피구금자들은
단식을 결행하였다.
이튿날 단식자 가운데 사망자가 생겼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피구금자의 석방을 촉구하는 격문 500여 매가 시내 곳곳에
살포되기 시작했고, 이에 호응한 면민 수천 명이 김기정의 집과 경찰서에 쇄도하여 투석함으로써 가옥 및 청사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김기정의 인척인 김기흔(金淇炘)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혐의로 피체 기소되었는 바,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인서(廉仁瑞 1910년48세~1910.미상) 전남 보성(寶城) 사람이다. 1908년 2월경 안규홍(安圭洪) 의병장이 보성에서 거의(擧義)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가
좌우포장(左右砲將)·좌우익장(左右翼將)이 되어 총으로 무장하고 보성·순천(順天)·동복(同福)·장흥(長興)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같은해 4월 6일 동료 의병 30여명과 함께 의병의 이름을 가탁(假託)하여 양민의 재물을 탈취하던 강사문(姜士文 : 龍彦)을 포박, 순천군
문전면(文田面) 고부기산중(古府基山中)에서 총살 단죄하였다. 이어 5월초에는 일진회원(一進會員)으로 일제의 밀정(密偵) 노릇을 하던
염영화(廉永化)를 보성군 봉덕면(鳳德面) 법화촌(法化村) 집에서 역시 총살, 단죄하였으며 12월 17일에도 동복군 내남면(內南面)
주정리(舟町里)에서 양민의 재산을 탈취하던 강모(姜某)를 잡아서 익사시켰다.
이듬해인 1909년 3월 6일에는 역시 양민의 재물을 강탈하던
일진회원 박봉조(朴鳳朝)를 잡아 머리를 난타하여 주살(誅殺)하였고, 9월 4일에도 역시 양민의 재물을 탈취하던 이용서(李用西)를 참살(斬殺)하는
등 주로 민간에 폐해를 입히던 일제 앞잡이들을 단죄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 뒤 1909년 9월 18일 일경에 피체되어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2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재항(廉宰恒,廉波 1899. 9.22~1985.12.15)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이다.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초모 공작활동, 적 정보수집, 유격전 등 항일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태민(廉泰敏 1920년35세~1920.11.10) 중국 길림성 혼춘현(吉林省 琿春縣) 황구(黃溝) 부근의 지방구장(地方區長)으로 있으면서 항일 항일활동을 하다가 일군에게 피체되어 1920년
11월 10일 연길현 두도구(延吉縣 頭道溝)에서 사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학섭(廉學燮 1896.12.30~1970. 9.13) 함남 이원(利原) 사람이다. 1919년 8월 26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국내의 군자금 모집과 교통통신을 위한 목적으로
조직하여 국무원령으로 공포한 교통국(交通局) 조직중 함경남도 교통사무국의 참사( 事)로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풍산청년회원(豊山靑年會員) 및
통신원으로 활동하다가 독립군과의 연락왕래 사실이 탐지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4월 1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형우(廉亨雨 1902. 3. 4~1930. 9.13) 강원도 김화(金化) 사람이다. 1919년 당시 김화군 김화읍에 살고 있었으며 배재고등학교(培材高等學校) 재학 중이었다. 그는 서울의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1919년 3월 13일에는 이춘봉(李春鳳)·장용하(張龍河)·서정기(徐廷基) 등과 같이 등사판으로
"8면(面)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 및 "일본인 한국이 침략한 이래로 조선민족은 일본인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압박을 당하고 있다"는 취지의
인쇄물 20여 부를 작성하여 각 집에 배포하였다. 또 3월 22일과 25일에 걸쳐 항일 유인물 <반도의 목탁(木鐸)> 제3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8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으며 9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흥미(廉興味) 광복군 대원으로 1920년 11월 모연대장(募捐隊長) 염흥미 등 16명이 함경도 갑산군에서 왜군 20명과 싸워 7명을 사살. 왜군과 싸우다 순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염기정(일명 기준 또는 기순 1885년~졸미상) 진잠 하나진벌 출생, 의병장. 2014년 애족장추서 후손 불명 미지급.
☆ 그외 독립운동가
염석산 - 1905년 충남 홍성 등지에서 독립운동하다 체포되어 순국 염승필 - 영월 출신으로 1919년 3월 태극기 만여장 제작 배포하다 체포되어 순국
염창순(廉昌順) - 함남 독립운동 광천보통학교 염청인(廉靑仁) - 함남 단천 독립운동 광천서당 염필주(廉弼柱) - 서울 독립운동 배재고보 염근용(廉近鏞) - 서울 독립운동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염희태(廉熙泰) - 강원 춘천 독립운동 춘천사범학교 염상도(廉尙道) - 일본 대판 독립운동 염상협(廉相協) - 서울 독립운동 염석범(廉碩凡) - 독립운동 조선농민사 염석복(廉錫福) - 평남 대동 독립운동 염세균(廉世均) - 강원 강릉 독립운동 염순석(廉順石) - 함남 함흥 독립운동 청년동맹 염영화(廉榮華) - 함남 함흥 독립운동 조선청년 총동맹 염우익(廉愚益) - 황해 서흥 독립운동 서흥청년회 염준모(廉俊模) - 서울 독립운동 염진희(廉珍熙) - 평북 강계 독립운동 염창언(廉昌彦) - 황해 장연 독립운동 염창렬(廉昌烈) - 황해 재령 독립운동 염태인(廉泰仁) - 일본 동경 독립운동 염태진(廉台鎭) - 독립운동 조선물산장려회 염화묵(廉化默) - 함남 단천 독립운동 염광록(廉光祿) - 독립운동 대동단 염기보(廉箕寶) - 독립운동 조선청년 총동맹
염대진(廉臺振) - 서울 독립운동 자작회 염덕신(廉德臣) - 서울 내자동 독립운동 신한혁명당 염두환(廉斗煥) - 함남 단천 독립운동 단천농민조합 염복양(廉復陽) - 경기 이천 독립운동 신정회 염상근(廉相根) - 서울 독립운동 조선 소년군 염덕민(廉德敏) - 함남 갑산 독립운동 대한광복단 갑산분단 염약현(廉若鉉) - 함남 갑산 독립운동 대한광복단 갑산분단 염의건(廉儀健) - 함남 갑산 독립운동 대한광복단 갑산분단 염가분 - 평북 의주 독립운동 신의주고보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운동사, 독립운동수훈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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